[매일춘추] 윗물이 흐려도 아랫물은 맑아야

입력 2007-06-08 07:35:29

청마 유치환 시인이 일선 중학교 교장시절의 한 일화다. 문예담당 선생님으로부터 교내 백일장을 통해 장원을 차지한 학생의 작품을 접하게 된 청마는 그 학생을 교장실로 불렀다. 그리고는 대뜸 학생에게 큰 소리로 나무랐다.

"이놈아 너 같이 글 잘 쓰고 공부를 잘해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 나가야 할 학생이 뭐가 어째!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윗물이 맑지 않으면 그냥 그대로 더럽게 내버려둬야 한다 그 말이가?" 응당 칭찬하시려고 불렀겠지 싶었던 학생은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용인즉, 학생이 쓴 글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취지의 산문이었는데 선생님들이 학생다운 자세이며 모범적인 문장력이라며 최고상으로 정해서 결재를 올렸던 것이다. 교장선생의 이 같은 태도에 놀란 반응을 보인 것은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청마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래 일등을 한 것은 축하할 일이고 또 글 솜씨도 좋구먼. 허나 내가 아쉬워하는 것은 자네 정도의 학생이라면 '윗물이 흐려도 아랫물은 맑아야 한다'라고 썼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 말이야. 그래야 세상이 발전하지 않겠어?" 옆에서 듣고 있던 선생님도 그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창의성을 생명으로 하는 당대 최고의 시인다운 생각이고 지적이다. 자칫 과거의 경험에 의존하는 학습은 이해가 빠르지만 의식을 정체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의식의 정체는 교육의 효과를 그만큼 반감시키기 마련이다. 교육의 올바른 선택은 비록 검정할 수는 없더라도, 그리하여 불확실성이 크다 할지라도 미래의 가치를 존중함이 마땅하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람(藍)이란 본시 그 잎으로 푸른 염료를 만들어 내는 쪽풀이지만 거기서 추출한 청색은 쪽풀보다 더 푸르다는 뜻이니 스승보다 나은 제자가 나와야 세상은 발전하는 것이다.

무릇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각기 다른 에너지를 양식으로 그 생명력을 유지한다. 어떤 것은 스스로의 땀에 의지하고 어떤 것은 외부의 충격에 의지하기도 한다. 또 더러는 과거를 양식으로 하고 더러는 미래를 에너지로 해서 자신을 변화시킨다. 청마의 이 같은 지적은 청(靑)을 추출하려는 교육자로서의 보다 적극적인 자세이자 열린 미래를 향한 길 안내에 다름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자질을 지녔더라도 유능한 길잡이의 도움 없이 에베레스트를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 우리에게는 국가의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유능한 길잡이가 필요하다.

민병도(화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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