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남자의 나라, 더 엄밀히 말하면 사대부의 나라였다. '조선왕비실록'은 사대부의 나라에서 살다가 간 왕비에 관한 역사서이다. 조선 왕비에 대한 이야기라면 궁궐의 암투 혹은 음지에서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렸던 신데렐라 정도로 알려져 있을 뿐 매우 부족하다. 이 책은 역사의 정점, 조선사회의 중심에 있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던 왕비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역사서이다.
작가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왕비에 대한 자료를 모으기 위해 실록에서부터 묘지명에 이르기까지 한줄 한줄의 기록을 추적해 그녀들의 삶을 복원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접하기 힘들었던 조선왕비들의 파란만장한 삶과 속내를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책은 개국 일등공신이었으나 죽어 버림받은 태조왕비 신덕왕후, 지극한 내조 끝에 얻은 것은 이름뿐인 태종왕비 원경왕후, 불심으로 불행을 막으려 했던 세조왕비 정희왕후, 얼음미인으로 얼음 같은 삶을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덕종왕비 인수대비, 환난과 복수로 점철된 한 맺힌 세월을 살았던 선조왕비 인목왕후, 남편과 아들 중 하나를 택해야 했던 혜경궁 홍씨(사도세자 비), 종묘사직에 목숨을 바쳤던 고종왕비 명성황후의 삶을 살피고 있다.
작가는 가능한 객관적인 사실을 전하기 위해 다양한 사료를 비교, 검증하고 있다. 예컨대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는 혜경궁 홍씨의 경우 실록뿐만 아니라, 혜경궁 홍씨 자신이 일기처럼 쓴 '한중록'과 정조가 쓴 '현륭원지'를 비교하고 있다.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가 자신의 친정집(노론) 변호하기 위해 쓴 일기에 가깝고, '현륭원지'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현양하기 위해 쓴 글이다. 따라서 두 글은 각각 불리한 면, 부정적인 면을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작가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두 글을 비교할 뿐만 아니라 실록'승정원 일기 등을 함께 살피고 있다.
이 책이 구체적으로 다루는 왕비는 7명이다. 그 외에 조선왕조의 모든 왕비와 폐비들에 대해서도 부록으로 간단하게나마 살피고 있다. 왕비들은 간택됐을 때 가문의 영광이요, 가문의 힘이 됐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들의 일생은 대부분 불우했다. 그들은 엄격한 궁궐의 법도 속에서 보편적인 사람살이와 동떨어진 삶을 눈물로 살다가 갔다. 운이 좋은 왕비는 자신의 희생으로 가문을 살렸지만, 운이 나쁜 왕비는 자신도 죽고 가문도 죽이는 꼴이 됐다. 남편이 죽임을 당하거나 자식이 죽임을 당하고, 형제자매가 죽임을 당하는 꼴을 감당해야 했던 사람도 있었다.
세자빈에 간택되지 않기 위해 초간택과 재간택 심사가 이어지는 동안 일부러 실수를 해서 간택을 피하려 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불우한 삶이 펼쳐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쩌지 못했던 사람들, 간택된 후에도 남편과 자식, 형제자매가 죽임을 당하는 광경을 눈뜨고 지켜보아야 했던 사람들, 그들은 봉건조선사회의 피해자였다.
남편의 무도한 행위를 바로 잡으려다 능욕을 당했으며, 결국 남편이 폐위되는 바람에 덩달아 폐위됐던 폐위왕 연산군의 왕비 신씨, 3남을 두었으나 2명은 요절하고, 1명은 세자가 됐으나 남편 폐위 후 죽임을 당했으며 자신도 목을 매 자결했던 광해군의 왕비 폐비 유씨…. 그들에게 국모의 자리, 궁중의 삶은 지옥이었을 것이다.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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