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니라도 배불리 먹이고 싶은데…"
오늘 아침 우연히 할머니의 눈물을 봤습니다. 지난 3년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할머니의 흐느낌이었지요. 수화기를 붙잡은 할머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습니다. 순간 아버지(40)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요. 당장 전화기를 빼앗아 집으로 돌아오라고, 함께 살고 싶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국을 떠돌며 공사장 일을 하고 있는 아버지의 고단함이 눈 앞을 스쳐가더군요. 보고 싶었습니다. 아니 아버지라고 불러보기라도 하고 싶었지요. 사내는 울면 안 된다는 아버지의 말을 새기며 곧장 학교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리곤 아버지에게 할 말을 떠올렸지요. 우리 여섯 식구 다시 모여 행복하게 살 때까지 할머니와 동생 둘 잘 돌보겠다고, 그러니 아버지도 몸 건강히 잘 계셔야 한다고…. 굳게 다짐을 했는데도 학교 가는 길 내내 아버지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결국 멈추지 않는 눈물을 훔치며 학교로 갔습니다.
3년 전 우리 여섯 식구 행복했습니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장사를 했던 부모님 아래 끼니 걱정 없이 살았지요. 건강했던 할머니도 저(15)와 동생들을 끔찍이 아껴주셨고, 평생 홀로 아버지를 키워낸 할머니는 당신이 늙어 복받게 될 줄 몰랐다며 언제나 밝은 모습이셨지요. 할머니는 아버지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대신해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으며 아버지를 키워냈지만 매번 아버지에게 '미안하다'고 하셨어요. 새벽 바람을 맞으며 나가 종일 일을 해야 했던 할머니는 아버지에게 온전한 사랑을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계셨던 거지요. 아버지가 자주 직업을 바꾸는 것도, 사업이 망하는 것도 모두 할머니 탓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손자들은 꼭 자신이 키워야 한다고 믿고 계신 분이셨지요.
할머니의 모든 바람이 깨진 것은 엄마(36)가 집을 나간 뒤부터였습니다. 양말장사, 목욕용품점, 옷 장사 등 빚을 내 하는 사업마다 잘 안 되자 엄마는 짐을 쌌습니다. "잠깐 볼일 보고 온다."는 말이 영원한 이별이 됐지요. 처음엔 엄마를 원망했어요. 밤마다 울며 엄마를 찾는 미영(7)이를 볼 때마다 엄마가 미워졌지요. 한동안은 아버지가 계셔 위안이 됐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빚 독촉을 견디지 못한 아버지마저 집을 등지자 자궁암 수술을 받아 수족을 제대로 쓰지 못했던 할머니는 한순간 저희의 보호자가 돼버렸습니다. 할머니는 아픈 내색 한 번 하지 않으셨어요. 다 아는데, 할머니가 얼마나 아프고 힘든지 다 아는데도 할머니는 눈물 한 번 보이지 않고 저희들을 키워내셨지요. 3천만 원이 넘는 빚이 있고, 학교 공납금이 매번 밀렸지만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으셨지요. 할머니도 많이 지쳤다는 것을, 주름이 날로 짙어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제가 해드릴 게 없습니다. 이젠 제가 할머니와 동생을 챙기려고 해요. 내년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아르바이트라도 해 동생 공납금 내려고요. 빨리 어른이 돼 동생과 할머니를 보살피고 싶습니다.
5일 오전 11시쯤 중구 동인동의 임말순(가명·66) 할머니는 막내 손자인 미영이의 숙제를 도와주고 있었다. 할머니는 "한창 클 나이인 손자들을 제대로 먹이지 못한다."며 한숨 지었다. 매달 나오는 정부보조금으로 사채 이자까지 내고 있는 할머니에겐 아이들 끼니 역시 문제였다. "막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여력이 있어야 할 텐데…"라며 한숨짓는 할머니는 끝말을 채 잇지 못했다. 자궁암 수술 후 쇠약해진 할머니의 어깨에 삼남매의 미래가 걸려 있었다.
저희 이웃사랑 계좌는 069-05-024143-008 대구은행 (주)매일신문사입니다.
정현미기자 bori@ms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