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머금은 미당문학관
바닷물이 넘쳐서 개울을 타고 올라와서 삼대울타리 틈으로 새어 옥수수밭 속을 지나서 마당에 흥건히 고이는 날이 우리 외할머니네 집에는 있었습니다. 이런 날 나는 망둥이 새우 새끼를 거기서 찾노라고 이빨 속까지 너무나 기쁜 종달새 새끼 소리가 다 되어 앞발로 낄낄거리며 쫓아다녔습니다만 항시 나만 보면 옛날 이야기만 무진장하시던 외할머니는, 이때에는 웬일인지 한마디도 말을 않고 벌써 많이 늙은 얼굴이 엷은 노을빛처럼 불그레해져 바다 쪽만 멍하니 넘어다보고 서 있었습니다.
그 때에는 왜 그러시는지 나는 미처 몰랐습니다만, 그분이 돌아가신 인제는 그 이유를 간신히 알긴 알 것 같습니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고기잡이 다니시던 어부로, 내가 생겨나기 전 어느 해 겨울의 모진 바람에 어느 바다에선지 휘말려 빠져 버리곤 영영 돌아오지 못한 채로 있는 것이라 하니, 아마 외할머니는 그 남편의 바닷물이 자기 집 마당에 몰려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도 못하고 얼굴만 불거져 있었던 것이겠지요.(서정주, '해일(海溢)' 전문)
뭐랄까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슬픔이 이 시에서 느껴졌지요. 무슨 설명이 필요한 것일까요? '질마재'엔 그런 슬픔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미당문학관으로 향했습니다. 작은 시골 마을에 아무런 색채도 지니지 못한 채 우뚝 선 높은 건물, 왠지 문학관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현대식 모습을 한 채로 미당문학관이 먼 바다를 향해 서 있었지요.
아직 건물만 이루어졌지 안에 비치된 자료는 미당을 되새기기엔 부족한 점이 많았지요. 하지만 문학관 옥상에서 바라본 산과 바다의 모습은 절경이었지요. 이런 곳이라면 어찌 시가 나오지 않으랴 싶었어요. 멀리 '질마재' 위에는 미당의 묘소가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지요. 이런 곳을 마음 한쪽에 담아 두고 미당은 오랜 시간을 타인들이 사는 곳을 전전했지요. 어쩌면 바보 같은 삶의 과정이었지요. 앞과 위, 그리고 양지만 바라보고 살았던 긴 세월들. 미당의 삶은 오히려 부끄러움의 연속이었지요. 이렇게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고향의 이야기는 접어둔 채 '귀촉도', '신라초', '동천' 등 오히려 경상도의 지난날 영광들만 들먹였지요. 어쩌면 그것들조차 경상도의 본질이 아니라 지워버려야 하는 껍데기들이었을지도 모르지요. 고향 '질마재'로 회귀한 것은 그래도 미당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었지요.
미당교라는 다리를 건너자 미당의 생가가 나타났지요. 여전히 깊은 우물, 그리고 장독대, 초가집. 그러나 미당문학관에서 느낀 부족함이 여기서도 그대로 느껴졌지요.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화석화되어버린 듯한 느낌. 그것이 나만의 느낌은 아니었지요. 어쩌면 미당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만들어낸 그런 미비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우뚝 선 현대식 미당시문학관, 깨끗하게 단장된 미당생가, 오히려 슬픔이 느껴졌지요.
하지만 문학관 전망대에서 바라본 줄포만의 아름다움, 변산의 절경, 그리고 '질마재' 고개. 가슴 한쪽이 뜨거워져옴은 인위적인 건물 때문이 아니라 그것 때문이었지요. 그것은 나름대로의 파격이었지요. 겉으로 나타나는 미당에 대한 타인의 평가와 미당이 가슴에 담고 살았던 '질마재'의 내면적 슬픔, 내 가슴에서 느끼는 파격과 미당이 느꼈던 파격, 어쩌면 그 동선(動線) 속에 '질마재 신화'가 생성된 것이지요. 파격의 민간 신화적 산문시집인 '질마재 신화'는 한국의 여느 농촌과 마찬가지로 범속한 가난이 세습되어오는 한 마을을 한국인의 신화가 숨쉬는 마을로 불멸화하고 있지요. 그 마을에 떠도는 간통 소문, 오줌발 소리, 죽어 해일이 되어 돌아온 온갖 설화와 풍문들은 그 신화 속에서 혼백과 육신을 얻고 현실의 공간 속에서 실재와 뒤섞이는 것이지요. 문학이 현실과 다르지 않고 신화가 현재적 사실과 다르지 않는 파격, 난 사실 그 동선 속에 존재하고 있었지요. '질마재'가 신화이고 미당이 신화인 것처럼 나도 잠시라도 신화이고 싶었으니까요.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 미당 서정주의 부끄러운 시간들
1992년 월간 '시와 시학'에 친일행적 시비와 관련, "일본이 망해도 한 백 년은 갈 줄 알았다.…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썼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변명했다. 1942년 "매일신보"에 다츠시로 시즈오라는 이름으로 평론 '시의 이야기-주로 국민 시가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친일 작품을 시작. 수필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 '인보(隣保)의 정신', '스무 살 된 벗에게'와 일본어로 된 시 '항공일에', 단편소설 '최제부의 군속 지망', 시로는 '헌시(獻詩)', '오장 마쓰이 송가' 등의 친일 작품 발표. 해방 직후 친일파를 대거 중용한 이승만 정권과 관계, 80년 신군부 등장 이후 전두환 대통령 후보의 찬조 연사, 대통령 당선 축시 헌사, 광주항쟁과 전두환 정권 수립 와중에 TV에 출연해 전두환 군사정권에 대한 지지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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