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영·수보다 자유 먼저 배우는 '느림' 해방구

입력 2007-06-02 07:42:04

경신정보과학고 부설 대안학급

▲ 오늘은 3학년 학생들이 졸업앨범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원학교로 많이 돌아갔다. 남아있는 학생들이 담임선생님과 함께 당구 경기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 오늘은 3학년 학생들이 졸업앨범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원학교로 많이 돌아갔다. 남아있는 학생들이 담임선생님과 함께 당구 경기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여기 와서 참 많이 변했어요. 무엇보다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호진이(포산고 3)는 기자를 졸졸 따라 다니면서 "우린 꼴통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11월부터 대안학급에 다니고 있는 서호진 군은 연예인이 꿈이다. 강호동 같은 듬직한 덩치만큼이나 웃기는 건 잘 할 것 같다. 자동차정비에도 능력이 있다. 현풍에 있는 집에서 학교까지 1시간30분이 걸리는데 그는 아직 한 번도 결석한 적이 없다. 학교가 재미있어서다. 포산고에 다닐 때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가 다니는 학교는 '대안학급'이다. 대구시 중구 도심 한복판의 경신정보과학고 부설 대안학급은 도시형 대안학교로 대구시교육청의 위탁요청으로 설립됐다. 지난 2003년부터 벌써 5년째. 5월말 현재 이 학급에는 경북고와 경신고, 달성고, 협성고 등 대구시내 여러 학교에서 온 11명의 학생이 있다. 입학을 원하는 학생에겐 언제나 문은 열려 있다. 학생들은 졸업 때까지 대안학급을 다니지만 졸업장은 원래 다니던 학교에서 받는다.

학생들은 오전에는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10여 개 교과목을 공부하고 오후에는 요일별로 정해진 현장학습과 과외활동을 한다. 5월에는 월요일 POP글씨, 화요일 골프, 수요일 풋살, 목요일 텃밭가꾸기, 금요일 다양한 견학활동 등으로 짜여져 있다. 공부만 하는 오전 수업은 사실 재미가 없다.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들은 드물다. 하지만 오후 시간에는 아무도 빠지지 않으려고 한다. 텃밭가꾸기를 제일 힘들어 한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할 때는 자신이 직접 심고 가꾼 텃밭을 가장 그리워한다.

대안학급에 다니는 아이들은 어떤 아이들일까. 대안학급은 인문계 고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최후의 보루로 생겨났다. 대학진학 위주로 짜인 학교생활이나 친구들과의 관계 때문에 잘 적응하지 못하거나 사고를 저질러 자퇴직전까지 간 아이들이 많이 왔다. 그런데 요즘엔 말썽꾸러기보다는 친구관계나 학교와의 갈등 때문에 오는 학생들이 더 많다.

권기학 교감은 "다니던 학교에서 낙인찍힌 아이들이지만 여기에 오면 정상적인 생활을 잘 해낸다."면서 "우리 학교에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변한다."고 말했다. 공부를 하기 싫으면 당구를 치거나 탁구를 칠 수도 있고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마음대로 불러도 된다.

학생들에게 대안학급 자랑을 부탁했다. 허웅(다사고 3) 군은 "(학교수업이) 교과목 위주가 아니라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며 "간섭하지않고 공부하라고 압박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에 진학, 사회복지학을 전공해서 나중에 상담봉사를 하고싶다고 계획을 말했다.

학교다닐 때 툭하면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친구들과 싸웠던 정성국(다사고 2) 군은 "자퇴할 생각을 했었는데 여기 와서 선생님과 형들이 잘해주고 도와줘서 참을성이 길러졌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한마디 말도 하지않던 성국이는 요즘 아버지와도 대화하는 시간이 부쩍 늘어 가족들이 깜짝 놀란다고 했다.

사진을 찍을 때 쭈볏거리던 구희도(협성고 2) 군은 "학교에 다니기 싫었는데 여기 와서는 자유로운게 가장 좋다."고 말했다. 희도는 학교다니기 싫어하는 친구들에게 "자퇴하지 말고 이곳으로 오라"고 권하기도 했다. 희도는 자기 이름을 빼달라고 하다가 "(이름을) 그냥 써주세요."라며 곧바로 자신감을 회복했다. 그의 이런 모습도 대안학급에 와서 달라졌다. 송대영(상인고 1) 군은 1학년이 자기밖에 없어서 아직 재미가 없다. 그러나 운동을 좋아해서 학교생활은 문제 없다.

그래도 다니던 학교가 좋다고 한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이들은 대안학급을 생각하는 친구들에게 "대안학급이 학생들에게 관심을 갖지않는다는 말은 아니지만 다니던 그 학교가 잔소리라도 해 줄 때가 제일 좋을 때"라고 말했다.

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 "스스로 변할때까지 천천히 기다립니다" 강효은 담임선생님

"아이들이 학교에 오면 스스로 변할 때까지 사랑으로 기다려줍니다."

설립 때부터 대안학급의 담임을 맡아 온 강효은(44) 교사는 "아이들이 변하는 모습을 보면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옛날 고등학교 학생주임은 작은 회초리를 들고 다니면서 두발검사를 하거나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단속에 나서는 호랑이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강 교사는 전혀 그런 티가 나지않았다.

"요즘 애들은 그 때와는 달라요. 처음 와서 적응할 때까지 관심을 표시하고 대화를 통해 친구처럼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그는 일주일이면 처음 온 학생이라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고 했다.

서호진 군은 선생님을 대놓고 '천사'라고 추켜세운다. "말이 필요없죠. 선생님은 우리가 하고싶은 건 다 해줍니다." 아이들에게 당구를 가르쳐주고 친구처럼 놀아주는 선생님. 텃밭을 가꿀 때는 게으름피우는 학생들 대신 일을 도맡아하기까지 한다. 이제 학생들은 그런 선생님의 사랑을 다 안다.

정말일까. 당구나 탁구, 배드민턴 등에 능해 전천후 선수 같은 강 교사는 아이들과 친구처럼 노는 걸 좋아한다. 특전사에 입대한 졸업생이 휴가를 나와 찾아오자 강 선생님은 학생들을 모두 데리고 나가 돼지국밥 한 그릇씩을 나눠 먹기도 했다. 그도 처음에는 매를 들었다. 하지만 이내 역효과만 난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아이들을 사랑하고 관심을 갖고 대화를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대학입시 등 진로다. 강 교사는 아이들과 직접 대화하는 시간이 부족해서 청소년상담센터와 연계, 매달 한차례씩 1대1 상담을 통해 아이들의 이 같은 고민을 들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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