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추억] (20)일제 군사시설

입력 2007-06-01 07:14:13

제주 비경 속에 숨겨진 일제 최후의 발악 흔적

▲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동굴 700개 섬전역 요새=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흔적은 그 뿌리가 넓고도 깊다. 하드웨어적인 측면만 보더라도 관공서, 철도, 다리 등 그 당시 세워진 시설물은 셀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그 중 일제의 군사시설은 우리에게 꽤 낯설다. 해방 후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난 6·25라는 동족 상잔의 기억이 더 선명하기 때문이다. 일제가 총칼을 앞세워 한반도를 지배했던 만큼 현존하는 군사시설은 상당히 많다. 예전 일본군 주둔지는 해방 후 진주한 미군과 한국군 부대가 대신했다. 서울 용산 한미연합사, 진해 해군기지는 물론이고 대구 남구의 캠프 헨리, 캠프 워커, 동구의 K-2비행장 등도 마찬가지다. 진해 해군 작전사령부가 1910년대 건축된 건물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을 뿐, 다른 군부대에는 일제 시설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엉뚱하게도 그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은 제주도다. 일제는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초 제주도를 본토 사수를 위한 최후의 방어선으로 정하고 섬 전체를 요새화하려고 했다. 일명 '결7호작전'이다.

일본이 섬 곳곳에 파놓은 동굴만 해도 700개 안팎이다. 한라산은 물론이고 나지막한 야산에 가도 어김없이 동굴들이 입을 벌리고 있다. 국립제주박물관 뒤편인 제주시 건입동 사라봉 시민공원에서 해발 100m도 채 되지 않는 산 정상으로 올라가다 보면 돌계단 옆에 큼직한 구멍이 눈에 들어온다. 속칭 사라봉 동굴 진지(등록문화재 제306호)다. 안으로 들어가면 20여m 길이의 ㄷ자형에 입구가 양쪽으로 나 있다. 굴 맨 안쪽에 파다 만 흔적이 있는 것으로 미뤄 채 완공되지 못했다. 사라봉에만 7개의 동굴이 있다. 주민 양상부(71) 씨는 "제주도에는 원래 만장굴 같은 화산 동굴밖에 없다."며 "일본군이 섬 전체에 구멍을 숭숭 내놓았다."고 했다.

인공 동굴 중 제일 큰 것은 대정읍 상모리 송악산의 일오동굴(등록문화재 제313호)이다. 바닷가 언덕 아래에 15개의 동굴이 나란히 뚫려있어 기묘한 형상이다. 일본 해군이 소형 어뢰정을 숨겨놓고 미국 함대가 나타나면 어뢰정을 탄 자살 특공대가 돌진해 자폭하기 위한 곳이다. 이를 가이텐(回天)특공대라고 불렀는데 비행기를 탔던 가미카제(神風)특공대와 같은 임무였다.

요즘 이곳에 수학여행단,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지만 드라마 '대장금' 촬영지라는 것에 호기심을 가질 뿐이다. 입구 간판에 '훼손 주의'라는 말이 있을 뿐 상세한 설명도 없다.

◆대구 불로동에 동굴진지=이와 비슷한 형태의 동굴은 성산 일출봉 옆의 수마포 해안과 돌하르방공원이 있는 조천읍 북촌리 서우봉 자락에도 있었다. 제주도동굴연구소 손인석(지질학 박사) 소장은 "이 동굴들은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미처 완공되지 못한 채 버려졌다."며 "해안지역 동굴은 완성도 면에서 30~40%, 내륙지역 동굴은 20~25% 정도에 머물렀다."고 했다. 제주도 주민들과 징용으로 끌려온 이들이 곡괭이만으로 동굴을 팠다는데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을까. 일제 동굴 진지는 부산, 여수, 전남 신안 등 서남해안 곳곳에서 발견된 것을 볼 때 일제의 막판 발악이 어떠했는지 새삼 짐작이 됐다. 대구시 동구 불로동 단산마을 옆 산자락에도 16개의 동굴 진지가 있다.

송악산에서 3㎞쯤 서북쪽으로 가면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가 나온다. 80만 평이 넘는 널따란 평야다. 일본 해군항공대가 주둔했던 알뜨르(아래쪽에 있는 들이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비행장 자리다. 논밭 사이로 큼직한 비행기 격납고가 줄지어 서 있어 기괴한 느낌을 준다. 숫자를 세어보니 무려 20개나 됐다. 가로 15,6m, 높이 6m에 콘크리트 두께가 1~4m나 돼 오랜 세월에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었다. 조금만 덜 튼튼했더라도 한 뼘의 땅이 아쉬운 농민들의 손에 벌써 부서졌을 것이다.

◆가미카제 특공대 흔적도=일본군은 1926년 20만 평의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1940년대 초 현재 크기로 확장공사를 했다. 가미카제 특공대가 훈련을 받던 곳이었다. 양파 농사를 짓던 70대 노인은 "주민들과 징용자들이 많이 끌려와 함바집에서 생활하면서 매일 노역에 동원됐다."면서 "식량부족 때문에 굶주리고 미군 비행기가 쏘는 총에 맞아가면서 비행장 공사를 했다."고 했다. 비행장 주위에는 고사포 진지, 지하벙커, 탄약고, 관측소 등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 중 활주로 북쪽의 지하벙커는 입구만 약간 무너졌을 뿐, 금방 만들어진 것처럼 시큼한 콘크리트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입구는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했지만 길이 20여m, 폭 5m정도의 내부는 꽤 넓었다. 그 당시 일본군 장교들이 작전지도를 펴놓고 머리를 맞댄 채 이런저런 토론을 벌였을 것이다.

활주로와 격납고 사이에는 5개의 고사포 진지가 있는데 2개는 완공됐고 나머지는 미완공 상태였다. 옆에는 창고 같은 탄약고 건물이 있는데 6·25 때 군경이 예비검속으로 붙잡은 주민 250명을 처형한 곳이다. '섯알오름학살터'로 불리는데 4·3유적지 공사가 한창이다.

요즘 제주도는 해군기지 건설 여부를 놓고 시끄럽다. 4·3, 6·25를 거치면서 수많은 비극을 간직한 섬은 군 기지문제로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다. 천혜의 자연환경은 늘 슬픔을 배태하고 있는 것일까.

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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