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2007 평양의 봄

입력 2007-05-31 11:00:00

그저께 평양을 다녀왔다. 통일자전거대회에 참가해 4박 5일간 머물렀다. 평양 방문은 처음이다. 그러나 연인원 1만 명이 평양을 오가는 시대인데다 지난 1999년과 2005년 금강산과 백두산 방문 시 이미 入北(입북)과 越境(월경)을 경험한 바 있어 설렘은 없었다.

북측은 통일자전거대회 참가자들에게 을밀대와 모란봉, 만경대 등 평양시가지 곳곳과 묘향산 등 북쪽 산천을 고루 보여주었다. 그러나 평양이 고향이 아닌 터에 특별한 감동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 풍경은 사진으로만 남을 뿐, 곧 기억에서 지워질 것이다. 그러나 김정숙탁아소, 금성학원, 김원균 명칭 평양음악대학, 인민대학습당 등에서 마주친 북쪽 사람들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 평양의 風致(풍치)는 조만간 잊혀질 것이나 남과 북의 대회 참가자와 나눈 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아릿하게 다가온다. 남포가 고향인 이홍제 옹은 올해 여든 살로 남측 참가자 중 최고령자였다. 그는 "걸어서 내려와 56년 만에 날아서 고향 땅을 밟는다"며 들뜬 표정이었다. 그에게 평양~남포 통일자전거대회는 고향에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갈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자전거를 타지 않았다. 남포로 가다가 반환점에서 돌아설 수 없을 것 같아서라고 했다.

그래도 이 옹은 고향 땅 근처라도 밟았으니 恨(한)은 풀었다. 모 은행 지점장 이인호 씨는 묘향산의 돌을 주어 가방에 담았고 평양 냉면집 옥류관의 빈대떡도 챙겼다. 북쪽이 고향인 그의 연로한 부친을 위한 선물이었다. 그는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이 선물들이 남과 북의 세관 검색에 걸릴지 몰라 마음을 졸였으나 무사히(?) 통과했다.

이번 방문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북측이 한사코 평양시민에 대한 접근을 막았다는 것이다. 공개 장소 외에는 사진조차 찍지 못하게 할 정도로 접촉에 과민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제한적인 접촉이나마 북측 사람들의 의식 변화도 감지됐다. '자본주의'에 관심을 보였고 '主體(주체)의 나라'를 자랑했지만 인간이 완벽하지 않은데 완벽한 제도와 시스템이 있을 수 있느냐고 반문하자, 입을 닫았다.

대북 사업 관련자들은 북측의 입장을 이해하는 인사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런 그들조차 북측의 생떼와 억지에 짜증이 날 때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대북 사업을 오래하다 보면 '反北(반북)' 시각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밝혔다. 이번 통일자전거대회에서도 북측은 자주 일정을 바꿨고, 참가자들에 대한 통제도 심했다. 그래서인지 주최 측의 한 인사도 방북 마지막 날 북에 올 때마다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또다시 오게 된다고 했다.

그렇다고 북측이 이번 행사 참가자들을 소홀히 대접한 건 아니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만경대 교예극장에서 열린 교예 공연 당시 북측은 앞의 일정이 지연되는 바람에 공연시각을 맞추지 못한 남측 참가자들을 위해 15분이나 공연을 늦췄고 앞좌석을 비워두는 배려를 했다. 남측 참가자들은 또 북측 인민군과 함께 박수를 치며 교예 공연을 관람하면서 인민군을 咫尺(지척)에서 관찰하는 望外(망외)의 기쁨(?)도 누렸다. 평양음악대학과 금성학원 학생들도 남측 대회 참가자들을 위해 기껍게 연주와 공연에 나서 주었다.

현재 남북은 이념은 애써 무시하고 한 핏줄이란 민족적 동질성에 기반한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있다. 하지만 핏줄도 돈 앞에는 무력한 시대다. 남북통일로 세금을 더 내야한다든가, 생활이 지금보다 어려워진다면 통일을 적극 반대할 기세다. 북측에게 남측 국민들의 이런 생각을 읽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한 핏줄이란 민족적 접근에서 서로 주고받는 시장적 접근으로 전환해야 관계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시켜야 한다는 얘기다. 이념과 민족을 넘어 시장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남북관계가 진전될 때 '평양의 봄'이 한층 포근해질 것이다.

조영창 논설위원 cyc58@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