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가끔씩은 현실의 자기와 전혀 다른 자신을 상상하곤 한다.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났더라면, 다른 형제자매를 만났더라면, 다른 학교를 다녔더라면, 다른 전공을 했더라면, 다른 직업이었더라면, 지금의 배우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맺어졌더라면…. 그런 상상은 끝도 없이 펼쳐진다. 딱히 지금 불행해서라기보다는 다른 삶이 궁금해서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말한다. "生(생)이 단 일회성에 그친다는 게 너무 아쉽다."고, "한 번 더 삶이 주어진다면 정말 멋지게 살아보고 싶노라."고.
며칠 전 歸天(귀천)한 수필가 금아 피천득 선생은 생전에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가지 않은 길'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노령으로 책 읽기가 힘들어진 선생에게 대신 책을 읽어준 사람이 마지막 낭독한 글도 이 시라 한다.
평생 술·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고, 웃는 모습이 해맑았으며, 칭찬만 할 줄 알았던 분. 변변한 세간살이도 없는 32평 아파트에서 25년을 살며, 버스를 타고 지인들을 만나러 가고, 서점에서 책을 사고, 때로는 카페에 앉아 홀로 차를 마시던 분. 20세기의 위대한 미술작가 마르셀 뒤샹(1887~1968)이 숨질 때 "나는 카페의 보이처럼 행복하게 살았노라."고 했다는데 금아 선생 역시 일상 속의 감사와 自足(자족)의 달인 아니었을까.
이런 선생도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이 컸나 보다. 물론 우리네 俗物(속물)처럼 권력이니 명예니 재물 따위의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찍 세상 떠난 어머니가 못내 그리워 아흔 넘어서도 '엄마'라고 불렀던 걸 보면 거문고 잘 타던 엄마를 다시 만나 못다한 어리광도, 투정도 부리며 평범한 행복을 누려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지….
우리곁에 언제까지나 머무를 것 같았던 금아 선생, 그리고 '몽실 언니'의 작가 권정생 선생.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같은 이 오월에 오월처럼 맑은 두 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떠나갔다. 한오라기 인연조차 없는데도 가슴이 시리고 하마 그립다.
금아의 시 '너'의 '새'는 끊임없이 채우려고만 하는 세상에서 '내려놓음'과 '비움'의 삶을 살다 간 그들의 자화상이다.'눈보라 헤치며/날아와/눈 쌓이는 가지에/나래를 털고/그저 얼마동안/앉아있다가/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아득한 눈 속으로/사라져 가는/너'.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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