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주름 잡힌 소금밭' 세월도 멈춘 듯 쓸쓸
반짝반짝 빛나는 은색 알갱이…. 원래 소금이 이런 모양이었던가. 보석이라도 이렇게 새하얗게 빛날 수 있을까.
바둑판 같은 가지런한 밭과 그 곁에 줄지어 서있는 큼직한 나무 창고. 전남 서해안의 염전(鹽田) 풍경은 무척 낭만적이다. 바닷가에 끝없이 펼쳐진 염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확 틔어지는 것처럼 청량한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 해질녘 풍경이 일품이다. 저멀리 하늘에 불그스름한 석양이 걸쳐 있고 염전 위에도 또 다른 석양이 둥둥 떠 있다. 전라남도가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는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낭만이 전부일까. 염부(鹽夫)들의 굵은 땀방울은 잊고 있지나 않을까.
◆무척 힘들지만…
어버이날인 8일 전남 신안군 지도읍 사옥도의 일광 염전. 김원태(56) 조성임(51) 부부가 일터로 향하는 시간은 오전 2시 30분. 이 시간에 깨어 있는 것은 이들 부부와 낯선 취재팀 때문인지 쉴 새 없이 짖어대는 앞집 개뿐이었다.
부부는 보일 듯 말 듯한 희미한 전등불 아래에서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소금을 긁어 모으고, 손수레에 실어 나르고, 대파(소금물을 미는 고무래)로 청소를 하고…. 허리 한차례 펴지 않고 정신없이 일했다.
오전 4시 30분쯤 일을 대충 끝낸 조성임 씨가 창고 앞에 잠시 걸터앉기에 겨우 말을 붙일 수 있었다. "그저께 비가 오는 바람에 오늘 수확이 좀 적네요. 세 수레 분량이 전부예요."
소금과 비는 천적이다. 천일염(天日鹽)은 햇볕과 바람으로 바닷물을 증발시켜 만들어지기 때문에 비가 오면 수확을 망치게 된다. 이들 부부는 그저께 저녁 비소리를 듣고 달려나와 겨우 소금물을 저장고로 옮길 수 있었지만 이웃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동네 사람들도 평소 같은 시간에 나와 일하는데 오늘은 모두 늦잠(?)을 자고 있다고 했다.
오전 6시쯤 부부는 집으로 돌아가 아침 먹고 또다시 농사일을 한다. 조 씨는 "염전 일은 육체적으로 무척 고되고 고통스럽다."면서 "주민들은 농사만으로 돈벌이가 되지 않아 두 가지 일을 병행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숙성 정도에 따라 아침·저녁으로 수확을 하고 낮에도 소금 물을 담고 옮기고 갯벌을 다지고 밭둑을 고치는 등 쉴 틈이 없다. 취재팀에게 소금을 좀 가져가라고 해 사양했더니 조 씨는 삽에 소금을 퍼들고 서 있었다. 할 수 없이 비닐 봉지를 들이대자 그는 "소금은 햇볕이 강한 여름철 제품이 가장 맛있지. 지난 여름에 만들어 보관해둔 소금."이라며 담아준다.
◆중국산 때문에…
전남 영광군 백수면 하사리 당백사 염전. 쓴 맛이 나지 않는 담백한 소금을 생산하는 곳으로 이름높다. 저멀리 넓은 염전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오후 2시 따가운 햇살 때문에 웃통을 벗어붙인 김종영(55) 씨는 밭 사이를 돌아다니며 소금물을 옮기기에 바빴다. 자연의 생산물이라고는 하지만 소금으로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공정이 필요하다. 바닷물을 모아놓는 저수지(貯水池), 10계단의 과정을 거치는 증발지(蒸發池), 소금을 수확하는 결정지(結晶池)작업을 거친다.
김 씨는 "모든 걸 인력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아마 최고 힘든 일이 아닐까요."라면서 "그런데도 수입이 신통찮다."고 했다. 5년 전만 해도 수입이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중국산이 판을 치는 바람에 소금 가격이 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농산물이 대개 그러하듯 유통 과정에 문제가 많았다. 염전에서는 30kg 소금 한 자루를 4천500원 정도에 살 수 있는데 시중에서는 1만 2천 원 정도에 팔리고 있었다. 산지에 비해 3배 가까이 비싸니 너무 불합리하지 않은가.
전북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 곰소 염전. 변산반도라는 이름 때문인지 염전 주위에 음식점이 꽤 많았고 아파트도 군데군데 세워지고 있었다. 염전은 한쪽 구석에 옹크리고 있었다. 다른 곳과는 달리 시원스런 느낌보다는 다소 쓸쓸하고 한적한 느낌을 줬다.
30년간 염전 일을 했다는 박정길(66) 씨는 "얼마전만 해도 소금밭이 100정(30만 평)도 넘었는데 이제는 절반도 채 남아있지 않지. 저기 빌라 자리도 소금밭이었는데…. "라고 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유명했던 곰소 염전은 얼마후면 다시 보지 못할 곳이 될지 모른다. 염부들은 요즘 힘든 일을 할 사람도 없고 경쟁력도 없으니 자연스레 없어지지 않겠느냐고 했다.
취재팀은 염전을 돌면서 소금을 많이 먹었다. 염부들은 '맛있다.'며 자꾸 먹어보라고 권했다. 소금 맛이 그렇게 괜찮은지 처음 알았다. 달고 담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금방 생산한 탓인지 쓴 맛은 전혀 없었다. 물론 저녁에는 갈증 때문에 끝도 없이 물을 마셔댔다. 역시 소금은 짰다.
글·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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