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권의 책] 까레이스키, 또 하나의 민족사/정동주

입력 2007-05-10 16:52:14

사할린이나 카자흐스탄을 여행하다가 '고려사람'을 만나면 종종 묻는다. '한국말 혹은 조선말 할 줄 아세요?' 그래서 그들이 한두 마디라도 우리말을 하면 공연히 반갑고 고맙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그랬다. 그런데 어느 날 '한국말을 아느냐'고 묻던 저자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고 한다.

'가능하다면 얼굴 생김까지도 러시아인과 흡사하도록 바꾸고 싶었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생존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될 수 있었던 역사가 시베리아에 있었다. 적어도 이 같은 위험과 불안은 1900년 초까지만 해도 존재했다.'

고려사람들은 한국말을 몰라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중국 연변의 조선족과 일본 전역에 흩어져 사는 재일 교포, 미국에 사는 교포 2세나 3세들이 한글을 모르는 경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조건이 시베리아에 있었다.

'고려사람'은 현재 연해주라고 부르는 '쁘리모리예변강' 즉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브스크, 빠르찌잔스크를 잇는 넓은 극동 시베리아 지역이나 중앙 아시아에 사는 한인'조선인 후예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이다. 이들이 연해주로 넘어간 것은 흉년과 기근, 농민반란으로 인한 극심한 생활고 때문이었다. 1860년대 하나둘 한반도를 떠나, 두만강 건너편 연해주에 모여 살면서 이들은 '고려사람'이 됐다.

고려사람들은 연해주에도 정착할 수 없었다. 1935년 스탈린의 강제이주가 시작됐고 1937년 8월말에는 모든 고려사람이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됐다. 고려사람에 대한 강제이주 이유는 아직도 논란이지만, 스탈린은 국경 근처에 거주하는 '믿지 못할' 사람들을 깨끗이 청소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들이 강제이주로 도착한 곳은 준사막 지대로 일년 내내 구름을 거의 볼 수 없는 땅이었다. 날씨는 건조했고 흙먼지가 많이 일었다. 집도 없었고, 사람도 없었다. 고려사람들은 그 버려진 땅을 일구었다. 하루 16시간씩 밭일을 했다. 아무리 튼튼한 처녀들도 2년만 일하고 나면 허리를 망치고 말았다. 나이든 고려사람 여자들이 허리가 심하게 굽은 것은 타고난 체형이 그렇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일군 밭을 소련사람들한테 빼앗겼다. 소련의 토지법에 따르면 고려사람들은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임대료는 해마다 올랐고, 수확의 7할 까지 현지인 지주에게 바쳐야 했다. 옛 소련이 해체되고 독립국가 연합이 되자 각 공화국도 태도를 바꿨다. 그들은 고려사람들이 피땀 흘려 가꾼 꼴호즈 운영권을 빼앗았다.

이 책은 조국이 둘이나 있지만 어느 쪽에도 갈 수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조선을 떠난 후부터 지금까지를 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운명을 다큐멘터리로 엮었다. 돌아올 수 없었던 사람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고려사람'들 뿐만이 아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했을 때 사할린 동포들 사이에서는 고국으로 귀국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남쪽 항구도시 코르사코프에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패전국 일본 사람들도 귀국을 위해 항구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차례차례 항구로 들어왔던 배는 모두 일본의 수송선이었다. 해방된 조국의 배는 오지 않았다. 바닷가에 진을 친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 기둥을 만들고 이불을 얹어 텐트를 치고 배를 기다렸다. 몇 달이 흘렀지만 고국의 배는 단 한 척도 오지 않았다.

지구상에는 지도에 없는 '제3의 한국'이 존재한다. 중국에 200만, 미국에 150만, 일본에 70만, 그리고 러시아에 47만. 이들 대부분은 타의에 의해 떠났고, 돌아올 수 없었다.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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