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이 평일에는 나라의 녹만 도적질해 먹다가 나라일을 그르치더니 이제 백성들을 이렇게 속인단 말이냐." 한양에 이어 다시 평양성을 버리고 도망길에 나서는 임금 선조의 일행을 가로막은 백성들의 절규였다. 자신을 경계하여 후손에게 교훈을 남긴다는 題名(제명)대로 조선 지배층의 무능과 부패를 고발한 징비록에 남겨진 기록이다.
징비록을 쓴 류성룡은 영의정을 맡으며 일본과의 7년 전쟁을 이끌었다. 도망갈 궁리만 짜내는 임금을 다잡고 염불보다는 잿밥에만 몰두하는 명나라 장수들과 씨름하며 '나라의 녹읍을 먹는자 어떠한 어려움도 피하지 않아야 한다'는 스스로의 말을 지켜갔다. 국난극복의 기치는 개혁이었다. 양반과 천인할 것 없이 누구나 국방의 의무를 지게 했다. 신분상의 특권을 내세운 양반과 그 양반의 사유물인 노비를 불문하고 병역의무를 지운 것이다.
가난한 백성들이 양반보다 몇배의 세금을 내야하고 서민의 피땀을 짜내는 방납의 폐단을 고치지 않고서는 백성들의 삶을 소생시킬 수 없다며 작미법(후일 대동법)을 시행하기도 했다. 황해도의 소금을 구어 곡창지대 쌀과 바꾸어 굶주린 백성들을 먹여 살리자고도 했다.
그러나 기득권을 깨려는 정책은 양반의 반발을 사게 됐다.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내 것은 양보할 수 없다는 계급 이기주의가 드러났다. 외적의 말발굽이 짓밟아도 노비에게 자유를 줄 수는 없고 백성들이야 굶어죽건 말건 양반의 주머니를 얇게 해선 안 된다고 여긴 것이다.
전쟁이 끝나갈 시점 주머니와 전대가 텅텅 빈 상태로 낙향, 두문불출한 선생은 선조 40년(1607) 편안하고 조용하게 돌아갔다. 사후 그에게는 조선 최고의 재상이라는 평가가 쏟아졌다.
하회마을을 비롯한 안동과 서울 등 전국 곳곳에서 선생의 逝世(서세) 400주년을 기념하는 추모행사가 열린다. 주말 낙동강변에서 열리는 추모행사에는 생전 그와 사상적 다툼을 마다않던 문중과 전쟁으로 맞선 일본, 중국 장수들의 후손들까지 참석, 화해의 장을 펼친다. 당파의 화합을 정치적 목적으로 삼았으면서도 서인의 공세로 동인이 되고 말았지만 역사의 줄기에서 그의 의미는 화합인 셈이다.
역사를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한다면 화창한 봄날 책 한권 끼고서 어린 아이 손을 잡고 역사의 한쪽에 서 봄은 어떨까.
서영관 북부본부장 seo123@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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