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문의 펀펀야구] 함팔이 도와준 이승엽 홈런

입력 2007-04-27 09:17:23

완연한 봄이다. 이사도 하고 결혼도 하는 좋은 계절이지만 날(日)은 잘 잡아야 한다. 친구의 함을 팔러 갔다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긴 이들이 있다.

2002년 11월10일, 대구시 수성구 한 주택가 골목. 양복입은 청년 5명이 함을 팔기 위해 모였다. 이들이 말(馬)에게 오징어 마스크를 씌우고 본격적인 행진을 시작할 때가 오후 4시 무렵. 이 시각 대구시민야구장에선 삼성과 LG의 한국시리즈 6차전이 열리고 있었다. 삼성이 5대4로 앞선 5회말 공격이었다.

"빨리해, 빨리." 마부가 동료들을 재촉했고 골목에 함성이 울렸다. "함사세요, 함." 한데 마부와 동료들이 말에게 빨리 가자고 성화였다. 마부가 말에게 독촉했지만 "그래도 함인데 막 갈순 없잖아."라며 말이 버텼다.

"그러다 역전되면 어떻게 해." 동료들이 재차 다그쳐도 "설마, 지기야 하겠어?"라며 말(馬)은 여전히 요지부동. "에이, 준혁이가 병살타 쳤어." 귀에 리시버를 꽂고 중계방송을 듣던 마부가 퉁명스레 말(馬)에게 말했다.

이곳에서 여느 함 파는 장면과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 것은 함을 사는 집이 김재하 삼성 단장의 집이었기 때문. 함이 가는 날, 마침 한국시리즈 6차전이 벌어졌고 삼성이 이기고 있을 때 빨리 함을 팔아야 기분좋게 잔치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옥신각신하는 사이 어느덧 함은 대문 10m 앞에 도착했다. 이제 함 사라고 한번만 외치고 점잖게 집 안으로 들어가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각 야구장에서는 LG 조인성의 안타가 터졌다. "야, 동점 됐어. 어떻게 하지?" 마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진 게 아니잖아. 투아웃이니까 기다려봐."

그런데 중계방송을 듣던 마부의 표정이 순간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2타점 안타래(LG 대타 김재현). 거봐, 조금만 일찍 들어갔어도…." 모두 원망스런 표정으로 말(馬)을 쳐다봤다. 멍하니 선채로 시간이 흘러갔다.

"두점 더 줬어, 이제 9대6이래." "몇 횐데?" "8회초." 침묵이 흘렀다. "하필 오늘 날을 잡아서…." 누군가 투정하듯 말했지만 아무도 나무라지 못했다. 시간은 흘러 오후 6시가 다 됐다. 어둠이 깔린 골목에 다섯 사내는 함을 안은 채 쪼그리고 앉았다. 리시버를 빼고 다 같이 라디오를 들었다.

9회말 1사 1, 2루 이승엽의 타석. 모두가 숨을 죽였다. 1초가 한 시간 같이 느껴지는 조마조마한 순간. 그로부터 1분 후 '동점 홈런'을 외치며 그들은 부둥켜안았고 골목 안 창문이 열리면서 터져 나오는 박수소리를 뒤로 하며 함 장수 처지도 잊은 채 신부측 집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뒤이어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이 터지며 삼성은 LG를 꺾고 꿈에 그리던 한국시리즈 챔피언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역시 이날은 길일(吉日)이었다.

최종문 대구방송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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