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길, 버스는 인정을 싣고 달린다
"버스 출발합니데이!"
17일 오후 2시50분 달성군 현풍면 현풍시외버스터미널. 올 4월 1일부터 달성4번 버스를 몰고 있는 정홍문(56) 기사가 손님들에게 큰 소리로 출발을 알렸다.
버스가 막 출발할 무렵 한 아주머니가 버스 앞쪽 문 계단에 한 발을 올린 채 "만 원짜리 낼라 카는데 거스름돈 있어예?"라고 묻는다. 기사 정 씨는 "잔 돈이 없는데 우야노. 기다릴테니 퍼뜩 잔돈 바꿔 오이소."라고 정겹게 답한다. 시동을 건 버스가 출발하지 않고 기다리는 사이 만 원짜리를 잔돈으로 바꾼 아주머니가 현금 1천100원을 내고 버스에 오르며 기사에게 고마워한다. "참말로 고맙습니데이. 이 버스 놓치면 꼬박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데 버스를 타 정말 다행이라예." 두 사람의 말과 행동에서 정이 묻어난다.
천천히 터미널을 빠져나온 달성4번 버스는 현풍할매곰탕 앞을 지나 속도를 높인다. 따스한 봄 햇살을 받으며 달리는 버스 차창으로 싱그런 연둣빛을 자랑하는 가로수들이 스쳐지난다. 차령이 10년이 넘은 대구70자 3834호 버스 실내에도 어느새 봄 향기가 가득하다.
달성4번은 오지지역을 운행하는 대구 시내버스 13개 노선 가운데 하나. 현풍시외버스터미널을 출발해 현풍할매곰탕-달성경찰서-현풍소방서-고봉리-유산-오설리-도동을 거쳐 도동서원까지 간다. 돌아올때엔 정리보건소-수리리-대리-대리마을회관-신기리-달성경찰서-현풍할매곰탐-현풍농협을 거쳐 터미널에 도착하게 된다. 시외버스터미널과 도동서원을 오가는 거리는 41.7km, 시간은 약 1시간가량 걸린다. 오전 5시30분부터 오후 11시30분까지 버스 한 대가 하루 7.5회를 왕복하고 있다.
달성4번 버스를 주로 이용하는 승객은 60대 이상의 어르신들. 아침, 저녁에 학생들이 버스를 타는 것을 빼면 달성4번은 어르신들의 충실한 '발'인 셈이다.
구지면에서 달성4번을 탄 곽병길(75) 할아버지는 "목욕을 갖다오는 길"이라며 "젊은 사람들이 자가용을 타는 것처럼 우리 같은 노인들에게 달성4번은 자가용과 매한가지"라고 얘기했다. 이말남(67) 할머니는 "대구나 현풍에 있는 병원을 오고가거나 볼일을 보기 위해 이 버스를 1주일에 3, 4번 정도 탄다."며 "기사 아저씨가 친절해 좋다."고 귀띔했다.
어르신들이 많이 이용하는 버스이다 보니 달성4번에는 도심을 운행하는 버스와는 다른 모습들도 많다. 우선 서서 가는 승객을 찾아보기 힘들다. 5, 10일 현풍 장날을 제외한 날에는 좌석을 다 채우기 힘들 정도로 손님이 없어 한산할 정도. 이날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도동서원을 가는 동안 손님은 모두 9명에 불과했다. 기사 정 씨는 "어르신 승객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버스에서 넘어지면 크게 다치실 우려가 높다."며 "때문에 손님들이 좌석에 다 앉은 후에 출발하고, 내리실 때도 안전 여부를 일일이 확인한다."고 털어놨다.
버스 운행 간격이 2시간이다 보니 달성4번은 '버스가 지난 뒤에는 손을 흔들어도 소용없다.'는 말이 적용되지 않는다. 어르신들이 지나가는 버스를 향해 손짓을 하면 버스가 잠시 멈춰 태워가는 경우도 더러 있다. "하염없이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할 어르신들을 생각해 마을 어귀에서 손을 흔들면 기다렸다가 태워드린다."는 게 정 씨의 얘기다.
달성4번에는 또 현금이 넘쳐(?)나고 있다. 어르신 승객들이 교통카드를 잘 사용하지 않고 현금을 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현금으로 내면 승차요금은 1천100원이지만 1천 원만 내고 100원을 내지 않는 승객들도 더러 있단다.
농촌지역을 운행하며 어르신들이 많이 타다보니 달성4번은 따스한 정(情)도 싣고 달린다. 버스 안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나 친지들끼리 인사를 주고 받으며 웃음꽃을 피운다. 이날도 이말남 할머니는 방앗간을 하는 김은순(61) 할머니를 만나 정답게 인사를 나눴다. 김 할머니는 "방앗간 수금을 하거나 장을 보고, 병원에 가기 위해 1주일에 4, 5번 버스를 탄다."며 "버스를 타면 아는 사람을 만나 안부를 서로 묻는다."고 얘기했다. 고생한다며 기사인 정 씨에게 요구르트나 음료수를 건네는 어르신들도 있다.
어느새 달성4번은 종점인 도동서원을 앞두고 있다. 왼편으로는 푸른 낙동강이 버스를 졸졸 따라오고 있다. 넉넉하고 푸근한 모습의 낙동강처럼 오지를 달리는 달성4번 버스에는 따스한 정이 흘러 넘친다.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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