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황사 섞인 봄비가 내렸다. 그래도 그의 집을 찾아가보고 싶었다. 사랑이라면 맹목적인 사랑이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까. 봄비 맞으며 찾아가는 낭만적 발걸음이 아니라 빠른 지하철을 선택했다.
그러나 東西線(동서선)으로 푸싱먼(復興門)까지, 그리고 다시 環狀線(환상선)을 갈아타서 푸청먼(阜成門)까지 가야하는 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지도를 더듬어 눈에 익혀둔 길이었지만 초행길인 외국인으로서 그의 집을 찾아가기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장미꽃 파는 아가씨에게 묻고 공안에게도 물어가며 찾아갔다. 그의 집이 있는 푸청먼 부근 거리는 중국 특유의 샹차이(香菜)와 고량주 냄새가 밴 붉은 등을 매단 식당들이 줄지어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있는 성안의 화려한 분위기와는 또 다른 옛 그대로 중국의 독특한 주황색과 잿빛 분위기가 남아 있는 골목이었다.
그 골목을 따라 북쪽으로 한 5분 정도 가다가 동쪽 골목길로 접어들면 바로 루쉰(魯迅) 박물관이 있다. 그렇다. 베이징 서쪽 옛 성문 부근에 있는 루쉰을 만나러 그 황사 빗속을 헤맨 것이다. 개성적인 콧수염과 짙은 눈썹의 좌상은 박물관 뜰에서 찬비를 맞으며 내 속마음을 헤아리는 듯 라일락꽃을 피워 올렸다.
그는 박물관 검은 지붕이 봄비에 먹물처럼 번지고 있는 것을 가리키며 무엇인가 나에게 말하는 듯했다. 문득, 하늘에 번지는 먹물의 이미지는 그가 살아가던 당대의 역사적 암울함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우리 대구 출신의 작가 현진건이 그의 얼굴에 포개졌다.
루쉰과 현진건은 서로 겹쳐지는 부분이 있다. 이 겹쳐짐은 1920년대 초기 한때 잠시 일본 자유주의파와 좌익문학청년을 사로잡은 러시아 작가 치리코프를 매개로 하고 있다. 일본어 번역판 치리코프 선집 가운데 '이나카초(田舍町)'라는 즉 '작은 읍'이라는 제목의 동일한 작품을 루쉰은 '성후이(省會)'로, 현진건은 '고향'이라는 제목으로 각기 자국어로 번역했다.
이 때문이었을까. 루쉰은 자전적 이야기에 가까운 귀향 소설 '고향'을 발표하였고, 현진건도 귀향하는 노동자 이야기를 전하는 형식의 소설 '고향'을 발표했다. 루쉰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당신이 羽化(우화)한 '빈집' 같은 '고향'은 무엇인가.
또 현진건에게도 같은 물음을 던졌다. 그들은 모두 대답이 없었다. 그들에게 고향은 그들이 태어난 구체적인 고향만이 아닐 것이다. 고향은 아마 그들이 처한 현실적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위로해주는 어머니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어머니는 논리를 초월하는 감성으로 우리의 절망을 감싸는 따뜻한 영혼이다. 그들이 집착한 '고향'은 바로 그것, 절망을 희망으로 움트게 하는 생명의 근원으로서 어머니의 여성성일 것이다. 그가 죽기 하루 전까지 썼다는 일기가 있는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미루고 작고 나지막한 집 문간으로 먼저 발길을 옮겼다.
이 보잘것없는 집이 루쉰이 베이징에서 머물던 집이란다. 그는 이 작은 방안에서 당대 중국의 역사적 절망감과 적막감을 노래했다. 그러나 내 관심은 이런 역사적 인식을 넘어서 루쉰의 체취가 아직도 남아 있는 낡은 방 한 칸에 있었다.
보잘것없는 책상, 거기서 루쉰의 정신적 불기둥이 훅 솟아오를 것만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오래된 빈집이 뿜어내는 광채를 상상해 보라. 빈집은 그저 세월에 살점이 떨어져나가듯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복제할 수 없는 자신의 고유한 이미지를 시간의 켜 속에 쌓아올리고 있는 것이다.
조금 비약하자. 대구에서 루쉰과 비슷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현진건 이상화 이장희 그들의 빈집은 어디 있는가. 대답할 수 없다면 루쉰의 낡은 방 한 칸을 떠올려 보는 것도 한 가지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는 어떤 고도한 기술로도 복원할 수 없는 그들의 집을 감싸고 있는 靈氣(영기), 즉 아우라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조두섭(시인·대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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