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24명 강원도 영월 답사여행

입력 2007-04-14 09:00:10

"단종애사 깃든 역사의 현장서 우리 가슴속 아픔도 털었어요"

"이젠 중국 칭다오(靑島)에 가보고 싶어요."

시각장애인인 최누리(20) 씨는 12일 난생 처음 강원도 영월로 '문화유적답사'를 다녀왔다. 낯선 곳으로 떠난다는 생각에 떨리기까지 했지만 이젠 그동안 배운 중국어를 마음껏 발휘하고 싶어졌다. 이날 영월에서 본 '단종(端宗)'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청령포'에 유폐된 단종이나 시각장애 속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자신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 속 단종이 오늘 그에게 세상으로 나아가는 비상(飛上)의 계기가 됐다.

시각장애에다 걸음걸이도 불편한 그는 "꼭 가고 싶은 곳을 말하라면… "이라고 머뭇거리다가 중국에 가보고 싶다고 또박또박 말했다. 중국어를 배운 지는 벌써 10년째다.

임정화(25) 씨도 이날 새로운 꿈을 가졌다. 시각장애에다 소아마비까지 앓은 그녀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 생활만 하다가 처음으로 강원도에 왔다. "너무 좋아요. 공기가 이렇게 맑은 줄 몰랐어요."라며 기뻐했다. 돌아갈 시간이 되자 "조금 더 놀고 싶다."며 아쉬워하던 그녀는 "일본에 한번 가고 싶다."고 말했다. 영월 답사는 그녀에게 해외여행의 꿈을 갖게 해줬다.

시각장애인 24명과 자원봉사자 등 40여 명은 이날 대구 효목도서관(관장 권계순)이 마련한 '시각장애인과 함께하는 문화유적답사'에 참여, 영월을 찾았다. 점자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는 효목도서관의 6번째 답사여행이다.

버스가 출발하자 모처럼 나들이에 나선 이들의 표정은 들떴다. 함께한 자원봉사자들은 벚꽃과 배꽃,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핀 도로변 풍경을 쉴 새 없이 설명했다. 단종묘인 장릉에 도착하자 권태식(55) 씨는 감회에 젖었다. 단양이 고향인 그는 어린 시절 소풍왔던 기억을 45년 만에 되살렸다.

두 팔로도 다 껴안지 못할 아름드리 소나무를 만나자 앞다퉈 달려가 안아보느라 난리법석이다. 정자각 등 문화유산 앞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이 더 바쁘다. 누각의 생김새는 물론 단종의 말탄 그림 등을 꼼꼼하게 설명하느라 정신이 없다.

청령포 가는 길. 평창강을 건너 배를 타야하는데도 전혀 무서운 기색이 없다. 강을 건너 자갈길을 거침없이 가로지른 장애인들은 단종이 거처했던 관음송 주변에 핀 진달래꽃 한 송이를 따서 맛을 본다. 눈을 뜨고도 갇혀있던 단종의 슬픔을 그렇게라도 확인하려는 몸짓이다.

이제 대구로 돌아가야 할 시간. "오늘 우린 행복합니다. 행복합니다." 그들은 소리쳐 외친다. 권계순 효목도서관장은 "오늘 여러분과 행복한 시간 잘 보냈다."면서 "(장애인의 날뿐 아니라) 평소에도 장애인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자신도 오늘 새로운 꿈을 갖게 된 최누리와 보낸 하루를 잊지못할 것이라고 했다.

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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