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이 흐르는 풍경)느티, 느티나무야

입력 2007-03-27 07:32:56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근 1천여 년 동안, 이 학교를 지켜온 나무인데. 교문에 떡 버티고 서서 드나드는 아이들의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조무래기들이 어른이 되고 그 아들딸과 손자들이 다시 찾아올 때까지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할아버지 같은 이 나무를….'

느티나무를 올려다보는 교장 선생님의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나옵니다. 며칠 후면 전기톱날에 밑둥치가 잘리고 포클레인 이빨에 뿌리가 뽑히는 줄도 모르고, 느티나무는 따스한 봄 햇살을 가지마다 걸어놓고 잎눈을 틔우느라 열심입니다.

지난 가을, 교문 앞 2차로 도로를 6차로로 확장하는 계획이 발표될 때만 해도 도면에는 문방구와 서점, 슈퍼마켓, 부동산중개소, 분식집…들이 죽 늘어선 길 건너편 쪽으로 빨간 금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간, 주위 건물의 벽이 온통 '죽음으로 사수하자! 서민 삶터 부수지 말라!'등의 붉은 페인트 글씨로 난장판이 되고, 겨울 내내 깃발을 펄럭이며 피켓을 든 가게 주인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더니, 얼마 전 확정 발표된 도면에는 그 빨간 금이 학교 남쪽 운동장 쪽으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운동장이 잘려 나가고 형무소처럼 높은 방음벽이 성큼 다가설 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혀, 교장선생님은 이 학교를 졸업한 어르신들을 대동하고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옮겨진 빨간 금을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금 안에 뿌리를 내리고 선 느티나무를 구해낼 방법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공사가 시작되어 툴툴툴 지축을 울리며 포클레인이 몰려와 학교 남쪽 담을 허물기 시작하던 날 아침, 교장 선생님은 쫓기는 마음으로 예정에도 없던 운동장 조회를 열었습니다. 연방 헛기침을 하며 단상에 올라선 교장 선생님은 한참 동안 아이들과 느티나무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보다시피 우리 학교 운동장 남쪽 일부분을 잘라 길을 넓히는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잘려 나갈 운동장에 선 저 느티나무를 내일부터는 볼 수 없게 됩니다. 옮겨 심으려고 했지만 너무 늙어 옮기면 살아날 희망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저 나무를 여러분의 가슴 속에 옮겨 심고자 합니다. 모두들 느티나무를 향해 돌아서세요. 지금부터 저 느티나무와 눈을 맞춥시다. 가슴을 열고 마음으로 느티나무를 껴안읍시다. 그리고…."

순간, 교정은 깊은 적막에 휩싸였습니다.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늘어선 아이들. 느티나무 머리 위로 멀리 검은 비구름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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