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예술을 낳는다)⑤박홍규 영남대 법대 교수

입력 2007-03-23 07:39:59

정신병 놀림받던 '소년 빨갱이'

박홍규(55) 영남대 법대교수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자동차를 한 번도 가져 본적이 없다. 휴대전화도 없다. 인터넷이 안 되는 집에서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아내와 밭을 갈며 자연주의자로 살아간다. 그는 냉철한 법학자이면서 내면에는 예술에 대한 불꽃 같은 사랑을 지니고 있다.

타협하지 않는 외골수에 스스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를 자처하는 그의 상처는 뭘까.

1961년 여름 한 소년이 철망 너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초라한 죄수복의 한 사내가 간수에 이끌려 머리를 깎고 있다. 땡볕이 참매미 울음처럼 따가웠던 그날. 소년은 날카로운 철망을 움켜쥔다. 철망이 손에 파고들어 피가 흘렀지만, 소년은 아픈 줄 몰랐다.

"아버지가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은 초교 4년인 저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5·16 쿠데타가 터지자 교원노조를 하던 아버지가 군인들에 끌려갔다. 아버지의 하루 3끼를 도시락으로 챙겨 날랐던 어린 마음은 한없이 스산했을 것이다.

"머리 깎는 것이 왜 그리 충격적이었는지 모르겠어요." 아마 머리가 갖는 권위와 상징성이 아닐까.

그는 일종의 '레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외할아버지는 6·25 때 부역으로 평생을 고생했다. "부역이라고 하기엔 사소한 것이었죠." 1950년 여름 마을에 온 인민군에게 밥을 해준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어린 마음에 또 큰 상처를 남긴다.

"대구중학교 1학년 때였죠. 그때는 반공수업이 있었습니다. 그때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썼습니다. 이게 무슨 죄냐. 밥해준 것뿐인데. 왜 우리는 이렇게 남북이 서로 미워하는가." 글을 본 반공도덕선생님이 부모님을 불렀다. "얘, 빨갱이인데, 정신이 이상하다. 정신병원에 가보라고 했습니다." 동인네거리에 있던 한 정신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13세 어린 나이에 정신병자로 몰려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내상을 남겼다.

'빨갱이'라는 소리를 듣고, 또 따돌림을 당하면서 그는 내면으로만 파고들었다. 책 읽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초교 4학년일 때 이미 일본 소설 '인간의 조건'을 읽을 정도. 일본의 젊은 대학생이 만주사변에 끌려가 허무하게 죽는다는 대표적인 반전소설이다. 니체의 허무주의에 빠진, 뭉크의 일그러진 그림과 자코메티의 비이상적 조각에 매료된 초교생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 당시 가난은 누구나 겪는 고통이었다. "저는 '오그락지'(무말랭이)는 먹지 않습니다." 유일한 도시락 반찬이었다. 중학교 때 '계란 후라이와 오그락지'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가난과 계급에 대한 인식이 도시락 반찬에 투영된 글이다.

그는 화가의 꿈을 가졌다. 그러나 그마저도 아버지의 반대로 용납되지 않았다. 그의 마음에는 저항 같은 것이 싹텄다. 68년 경북고에 다니면서 삼선개헌 반대 데모에 나섰다가 정학을 당하고, 경찰서 신세를 지기도 했다. 대학 때는 중앙정보부까지 끌려가 고문도 당했다. 그러면서 그는 가진 것 없는 가난한 노동자의 편에 서게 된다.

3공단과 노원동 등 가내공장의 노동자들과 어울리며 그들에게 노동교육을 시작했다. 근로기준법만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예술을 얘기했다. 베토벤의 곡을 들려주고, 존 레논의 노래 가사를 설명해줬다. "빈센트 반 고흐 얘기도 많이 했죠. 그는 여러분의 친구다. 평생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과 고통을 나누던 노동자 화가라고 했죠." 비록 화가의 꿈은 접었지만, 여전히 그는 그림을 그리며 예술을 찬양하고 있다.

그의 삶은 되짚어보면 그는 편한 길을 걷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노동법을 연구했고, 여러 번의 좌절을 맛보면서도 끊임없이 자신과 싸우고, 외부의 부조리에 저항하고, 낮은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권위주의가 싫었어요. 인간은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움직이며, 스스로 생각하는 자율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개인의 권리를 극대화하고, 정부 권한을 최소화하자는 아나키스트적인 삶이다. 자본주의 국가의 사회 시스템을 비판한, 프랑스의 신부 출신 철학자이자 교육운동가인 이반 일리히를 국내에 처음 소개했고, 아시아에 대한 서구인의 몰이해를 비판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번역한 것도 그 연장선이다.

그의 관심사는 전공인 법학부터 예술, 교육학까지 다양하다. '레드 콤플렉스'도 83년 일본 오사카시립대학에서 사회주의의 허구를 깨우치면서 극복했다. 그러나 소유와 자본의 만능주의에 대한 저항은 더욱 절실해졌다.

자본주의 나라에 살면서 자본의 큰 길에서 비켜 살고 싶다는 욕망은 어떻게 보면 한없이 불편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전혀 불편하게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학연과 혈연, 지연을 거부하며 자연생태주의자 스코트와 헬렌 니어링 부부처럼 살아가고 있다. 집에서도 책 읽고, 그림 그리고, 음악을 들으며 농사짓는 일이 일과의 전부다.

그러나 그의 속은 여전히 뜨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술에 대한 그리움이다. 텁수룩한 수염에 노동자와 함께한 고흐의 삶이 그에게서 넘쳐흐르고 있었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약력

경북 구미 출생. 영남대 법대와 동대학원 졸업. 일본 오사카시립대학에서 박사학위.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 교수 역임. '법은 무죄인가'로 1997년 백상출판문화대상 저작상 수상. '한국과 ILO', '노동법', '법사회학 서설' 등이 있고, '고야' '빈센트가 사랑한 밀레' '오리엔탈리즘' '내 친구 빈센트' 등을 출간했다. 현재 영남대 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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