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이정의 독서일기] 신기생뎐/ 이현수

입력 2007-03-22 16:49:32

찢어지고 멍드는 살처럼 혹은 부러지는 뼈처럼 마음도 쉽게 '상처'난다. 마음도 일종의 물질일까. 그것이 만일 물질이라면 참으로 섬세하고 보드라운 물질이겠다. 살이나 뼈보다 더 자주 상처받고 더 깊이 찢어지는 것이 마음이고 보면. 패이고 갈라진 손금의 무늬가 저마다 다르듯 상처의 종류와 크기도 사람마다 다르다. 이 책은 그런 상처들의 이야기다.

군산 '부용각'에 사는 기생들과 그 주변 인물들이 엮어내는 삶의 가락들이 마치 '운명 교향곡'처럼 뜨겁고 웅혼하다. 부용각의 주인이자 부엌어멈인 욕쟁이 타박네. '줄과부 떼과부 등천하는 집구석'의 업보를 끊어내고자 여덟 살에 기방에 들여보내져 소리기생이 된 오마담. 그녀의 기둥서방인 전직 쓰리꾼인 김사장. 철도옆 굴왕신같은 집에서 '끝순'이로 태어나 '뼈가 자라기도 전에 뼈가 시린 것부터' 터득한 춤기생 미스 민. 이십여 년을 하루같이 꿀물을 타 오마담의 마루 앞에 가져다 놓는 정원사 박기사. 그들이 모두 '이 풍진(風塵)세상'을 야무지게 살아내는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처를 결코 뱉어내거나 던져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상처를 제 몸의 일부인양 품고 산다. 상처를 덧내거나 들쑤시지 않고 오래 품고 걷다 보면 상처의 자리에서도 새싹이 나고 꽃이 핀다. 그야말로 상처에서 '도(道)'가 트인다.

"도가 무어 그리 거창한 것이간? 도를 통한답시고 계룡산이다 지리산이다 명산대찰만 대고 찾아다니더라 만, 도란 것이 이 콧구멍 만한 부엌에서도 얼마든지 통할 수 있다 그 말이여....눈감고 대충 넣어도 지절로 간이 맞을 때가 와. 그런다고 마음놓고 설렁설렁 했다가는 금세 내리막을 타는 거이 손맛이여. 늘상 마음 한 귀를 여물게 붙잡고 있어야 손맛이 하냥 보존되야." 하던 부엌어멈 타박네나, "기생은 마음에 굳은살이 배겨 송판처럼 딱딱해져야 온전한 기생으로 완성이 된단다. 송판처럼 딱딱해진 다음에야 몸도 마음도 물처럼 부드럽게 열릴 수가 있는 법이거든." 하던 오마담은 자신의 상처로 이미 길을 낸 사람들이다.

숙명적 외부적 횡포에 맞설 만한 무기 하나 없이 애초에 맨몸으로 세상에 던져진 인간은 차라리 상처가 옷이며 밥이다. 그러니 상처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다만 우리에게는 상처를 대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을 뿐이다. 자신의 상처를 생의 버팀목으로 삼아 운명을 완성해 가는 사람. 혹은 자신의 상처를 타인에게 전이하거나 세상에 투사하느라 전 생애를 허비하는 사람.

태어나는 순간 삶이 완전히 결정되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삶의 어느 자리에서든 그 어떤 상처에서든 완성을 향해 나아가려는 생명의 움직임은 그래서 더욱 장엄하다. 주어진 숙명의 거친 거적 위에서 타박네는 음식으로, 미스 민은 춤으로, 오마담은 소리로 자신만의 오묘한 삶의 무늬를 만들어낸다. 이들에겐 삶 자체가 지고의 스승이다. "허무니 절대고독이니 운운하는 이들은 아직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오마담의 말이 눅눅한 마음에 쨍한 햇살처럼 쏟아진다.

bipasor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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