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추억] ⑨술도가

입력 2007-03-09 07:05:46

막걸리에 묻힌 내 청춘을 위해 건배!

40, 50대라면 누구나 막걸리에 얽힌 추억은 한 두가지 정도 갖고 있다. 술 심부름 갔다 오다 주전자에 입을 대고 몇모금 훔쳐 마실 때의 짜릿함, 술도가 부근을 서성대다 어른 주먹 크기 만한 고드밥을 얻어 먹을 때의 즐거움...

성인이 된 후에도 새참 때 논두렁에 걸터앉아 한잔 쭉 들이킨 후 포만감에 배를 툭툭 두드리기도 했고 어두컴컴한 술집에서 한참을 떠들다 친구가 찌그러진 주전자로 따라주던 막걸리 맛에 한없이 젖어들기도 했다.

막걸리의 전성시대는 60, 70년대였다. 역동적인 시대에 막걸리는 거의 유일한 주류였다. 전국에 3천개가 넘는 막걸리 공장이 있었고 자그마한 면(面)소재지에도 2, 3개씩 있을 정도였다.(현재 경북에는 140개, 대구에는 달성군을 포함해 11개가 남아 있다.)

그러나 세월은 사람들의 입맛과 기호를 순식간에 바꿔 놓았다. 막걸리는 갈수록 사람들에게서 멀어져 갔고 그 대신 수많은 술과 음료가 쏟아져 나왔다. 이제는 대부분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뿐, 활력을 보이는 술도가는 찾기 어려웠다.

"예전부터 해오던 일이라 그냥 하고 있죠. 우리 두 사람 월급도 채 나오지 않습니다." 의성군 의성읍의 의성탁주 대표 장태환(64)씨는 "80년대 후반만 해도 하루에 수백 말을 팔았지만 요즘은 몇 말도 어렵다."면서 "농촌에 술 마시는 인구가 계속 줄어 언제까지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 술도가는 1930년대 후반 일제 강점기 시대에 세워진 나무 건물이다. 그래서인지 곰팡내 풍기는 건물안에는 어른 혼자서 들기 힘든 커다란 발효 독이 유독 많았다. 지금은 8개의 독만 사용하고 있는데 나머지는 먼지만 잔뜩 덮어쓴채 뒤집어져 있다. 의성군에는 현재 10여개의 술도가가 남아 있는데 주인 대부분이 70, 80대라고 했다.

영양군 영양읍의 영양양조장은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술도가다. 1926년 만들어졌고 지난해말 문화재청에 등록문화재로 지정 예고될 만큼 그 당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듬성 듬성한 나무 창살을 통해 사무실이 훤히 들여다 보이고 단단하고 두꺼운 문짝과 높고 낡은 천장이 인상적이다. 거기다 칠이 벗겨진 주판까지 책상위에 놓여있다. 덧밥을 섞는데 쓰는 나무상자는 얼마나 손때가 많이 묻었는지 표면이 반질반질하게 변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청주 공장이었는데 해방후 막걸리 공장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배인 박종화(74)씨는 "일본 사람들이 건물을 단단하게 지어놓아 80년된 건물인데도 벽에 갈라진 곳 하나 없다."면서 "등록문화재로 지정되면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게 돼 정부에서 매입해주길 바라고 있다."고 했다. 이 양조장도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 언제 없어질 줄 모른다.

청송군 청송읍의 청송양조장을 찾아가니 1명ㅇ 커다란 술도가를 지키고 있었다. 대표 김동수(58)씨는 "혼자 막걸리를 만들고 배달하고 영업도 한다."고 했다. 작년에는 서울 업체에 '청송얼음골 막걸리'라는 상표로 납품을 하느라 종업원 8명과 함께 일했는데 그것도 얼마전에 중단했다고 했다. 이곳은 그 유명한 '청송 심부자집'에서 운영하던 양조장이었는데 지난 94년 김씨가 인수했다. 당시만해도 400평이 넘던 큰 술도가였는데 IMF이후 4분의 1 정도로 규모를 줄였다고 한다.

막걸리 산업은 과연 이것으로 끝일까. 농촌지역 술도가는 며칠에 한번씩 술을 빚고 조금씩 내다 파는데 그치고 있었다. 지난 6일 이곳 저곳을 수소문 하다 우연히 상주시 은척면에 있는 '은자골 탁배기'공장을 찾게 됐다. 은척면 소재지는 상주시내에서 20km나 떨어져 있는 산골지역인데도 경북에서 처음 보는 현대식 건물의 막걸리 공장이 눈에 띄었다.

3대째 술도가를 운영한다는 이재희(34)씨는 "상당수 술도가는 원료로 밀가루만 쓰지만 우리는 쌀과 밀가루를 다양한 비율로 섞어 만든다."며 "가격이 다소 비싸지만 상주, 문경은 물론이고 대구에서도 주문이 들어와 수입이 괜찮다."고 했다. 90년대 후반부터 상표 등록을 하고 막걸리 고급화에 나선 것이 주효했다고 한다. 옛것과 현대와의 만남. 여기에서 다소나마 희망을 엿봤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글: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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