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년이 지났지만…" 독립운동가 유족들 '가난의 악순환'

입력 2007-03-01 10:37:26

독립운동가 이병구 선생의 손자인 현칠(83·대구 달서구 상인동) 씨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할아버지가 가끔은 원망스럽다고 했다. 이병구 선생은 의병활동을 한 후 일본공사관 폭파 시도와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에도 나서다 투옥됐으며 현칠 씨가 3살 때인 1926년 결국 숨졌다.

할아버지가 떠난 자리엔 가난과 무학의 고통만 남았다. 4형제의 맏이였던 이 씨는 일제시대 단기교육 기관이던 간이학교를 겨우 마친 뒤 남의 가게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가난은 대물림돼 이 씨의 두 아들 역시 초교조차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지난 1990년 건국포장이 서훈됐지만 이 씨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고, 2년 전 중풍을 앓던 아내를 떠나 보낸 뒤 혼자 살고 있다. 두 아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씨는 "간경화가 온 지 5년이나 됐고 일을 전혀 못해 보훈연금으로 연명한다."고 했다.

광복이 된 지 62년, 그러나 독립운동가의 유족들은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독했던 가난은 '무학(無學)'을 낳았고, 이 때문에 제대로 된 직업을 얻지 못해 가난의 악순환을 끊지 못하고 있는 것.

독립운동가 강제희 선생의 유족인 홍주(57·대구 달서구 신당동) 씨도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 1977년 건국포장 애국장을 포상한 강제희 선생은 3·1 운동 당시 평북 창성군 만세 시위를 주동했고, 이후 만주로 가서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유족들의 삶은 팍팍하기만 해 누님과 살고 있는 강씨는 연금(111만 원)에서 대출 이자를 갚고 난 78만 원이 생계비의 전부다. 그런데도 강 씨는 월 소득 154만 원(4인 가족 기준) 이상인 생계 유지층으로 분류돼 있다. 경기도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들과 충북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딸의 소득이 더해진 때문이다. 강 씨는 "4인 가족 최저 생계비(법정 생계비 180만 원) 수준의 연금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처럼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현실은 보훈청의 ㅌㅎㅇ계와는 다소 다르다. 대구보훈청에 따르면 4인 가족 기준 가구당 월소득이 법정 최저생계비 180만 8천 원을 넘는 유족이 83.6%로,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생활이 안정돼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반면 한 달 소득이 보건복지부 최저생계비인 122만 원에 못 미치는 경우는 13명(2.8%)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현재 유공자 생활실태조사가 자녀의 소득까지 합산해 보훈수혜자의 소득이 넉넉하지 않더라도 숫자상으로는 잘 사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대구보훈청 관계자는 "민법상 부모의 부양의무는 자녀에게 있기 때문에 자녀의 소득을 합산하고 있다."며 "아무리 자식들이 잘 벌어도 부모 지원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실제 체감 수준과 통계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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