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오후 대구 달서구 상인동 '새벗도서관'. 엘리베이터를 타고 9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이런 곳에 도서관이 있을까' 싶던 의구심은 문이 열리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마룻바닥과 책장이 조화를 이룬 아담한 풍경에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현관문 옆 나무계단을 밟고 올라간 공간은 사랑방을 연상시켰다. 통유리 밖으로는 월배 지역이 한 눈에 들어왔다. 도서관 하면 으레 떠올리는 공립 도서관의 크고 딱딱한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도서관 생기고 마을이 바뀌었어요."
"봄 방학이 시작된 후 하루 평균 200여 권으로 대출량이 늘었어요. 주로 가족 단위 회원들이 많습니다."
새벗 도서관은 1989년 설립된 대구 최초의 민간 도서관. 지난해 6월 상인동으로 이사를 와 새로 문을 열었다. 가족 회원제로 운영되는 이 곳은 한 가족이 6개월에 3만 원, 1년에 5만 원만 내면 얼마든지 책을 읽고 빌려갈 수 있어 인근 주민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보유한 장서는 3만 5천여 권에 달하고 연 평균 3천여 권의 새 책을 들여놓는다. 전국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성공한 민간 도서관 사례에 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기호석 도서관 운영위원은 "이곳의 운영 주체는 300여 명에 달하는 주민 회원들"이라며 "민간 도서관이라는 어려움을 딛고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마을 도서관에 대한 주민들의 자발적인 동참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같은 날 찾아간 달서구 도원동 '도원 도서관' 역시 봄 방학을 맞아 찾아온 학부모,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달서구청이 25억여 원의 예산을 들여 지난 해 3월 부설 어린이 도서관(상인동)과 함께 문을 연 이곳은 '대구 최초의 구립 도서관'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장서 수는 6만여 권. 대곡지구 아파트 촌 한 가운데에 위치한 이 도서관은 1년만에 주민들의 중심 문화 공간이 됐다.
배은숙 관장은 "예전에는 가깝다고 해야 남부 도서관, 서부 도서관 정도여서 주민들이 차를 타야만 했다."며 "요즘은 편하게 걸어서 오는 손님들이 대부분일 정도로 접근성이 좋아졌다."고 했다. 가까워진 도서관은 문화 공간 구실도 톡톡히 하고 있다. '독서와 글쓰기', '유치부 동화구연', '우리 아이 좋은 습관 들이기' 등 무료로 진행되는 강좌들은 일정이 발표되기 무섭게 정원이 차버린다. 건강, 문화, 레저 등 참살이(웰빙) 도서 400여 권을 따로 비치하고 있으며, 온돌바닥으로 된 어린이 열람실과 디지털 자료실은 특히 이용자가 몰리는 코너다.
도원 도서관 독서클럽의 한춘자 씨는 "22명의 주부 회원들과 함께 한 달에 한 권의 책을 정해 읽고 이야기를 나눈다."며 "큰 도서관과 이런 작은 도서관들이 함께 커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을 도서관 붐, 이유는?
2005년 5월 팔공산 자락 대구 지묘동에 문을 연 '한들 도서관'. 퇴임 초등 교장이 1천만 원의 사비를 털고, 농협이 무상으로 장소를 빌려줘 탄생한 이 곳은 동네 사람들의 힘으로 일궈낸 '작은 기적'이었다.
유정실 관장은 "개소식 날은 마을 잔치가 따로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지묘초 교장으로 근무할 때부터 이 일대가 도서관 사각지대인 점이 무척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새로 생긴 동네 도서관은 단지 가깝고 책 빌리기가 쉬운 대여점이나 열람 공간 정도가 아니었다. 한들 도서관은 장서 수가 9천여 권인 미니 도서관이지만 이 도서관으로 인해 주민들의 생활에 작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도서관에 아이가 있는 동안은 부모님들이 마음놓고 할 일을 하시더라구요. 36명의 어머니 자원봉사자들이 내 자녀처럼 돌아가며 봐주시니까요." 개소 당시 500여 가족에 달하던 회원은 2년만에 1천300 가족으로 늘었다. 고정 고객(연회비 1만 원)이 확보되면서 독서토론 교실, 원어민 영어 강좌 등 문화강좌에는 늘 학생들이 넘쳤다. 학부모들이 육아, 교육문제를 서로 상의하고 도서관 프로그램을 고르는 등 사랑방역할로도 손색이 없었다. 올해는 '한 마을 한 권 읽기' 운동을 추진과제로 선정했다.
대구에서는 최근 수년새 소규모 마을 도서관이 하나 둘씩 생겨나고 있거나 추진중에 있다. 작아도 가깝고 가기 쉬운 도서관을 선호하는 추세가 두드러지고 있기 때문. 형태도 구립, 민간 주도로 다양해지고 있다. 현재 대구에서 운영되고 있는 소규모 도서관은 8~9곳 정도. 구립인 도원 도서관, 어린이 도서관, 성서 도서관(추진중), 수성 도서관(추진중)과 민간에서 운영하는 새벗 도서관, 한들 도서관, 칠곡 구수산 도서관과 더불어 숲 도서관 등이 있다.
동네 도서관은 비단 도시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신남희 새벗 도서관장은 22일 마을 도서관 건립을 추진중인 충청도 옥천의 한 시골마을에 다녀온 소감을 "사람 냄새나고 재미있는 공간에 대한 소중함을 새삼 느꼈다."고 표현했다. 이 마을 경우 주민들이 낙후된 교육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도서관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자, 농협에서 부지를 제공하고 한 기업 문화재단에서 지원금을 제공해 활발하게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신 관장은 "마을 사람들이 함께 도서관 건립을 추진하면서 인재에 대한 소중함과 고장에 대한 자부심을 깨닫게 된 듯 보였다."고 덧붙였다. 대구에서는 최근 안심, 신서동, 지산·범물 등 공공도서관이 먼 신흥 개발지구나 주민 밀집지역에서 이런 소규도 도서관 건립 얘기가 나오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마을 도서관의 현실
하지만 소규모 도서관들은 재원 마련, 공간 확보 등 험난한 과정을 거쳐 문을 열어놓고도 운영에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구립을 제외한 사설 도서관은 지원이 미비할 뿐 아니라, 아직까지 '도서관=공공시설=무료'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적정한 이용료를 제시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운영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다.
새벗 도서관 경우 지난해 시와 구청으로부터 운영비 명목으로 각 1천만 원, 도서구입비로 2천만 원을 지원받았다. 그러나 이 돈으로는 연간 3천여 권의 새 책 구입과 시설유지비를 충당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신 관장은 "도서관을 이곡동에서 상인동으로 이전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월세가 너무 비싸서였다."며 "마을 도서관 추진에 가장 큰 숙제가 공간과 비용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들 도서관은 올해 동구청에서 200만 원의 장서 구입비를 지원받았지만, 1천 권의 신간을 마련한다는 계획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나마 이 정도 지원조차 없는 마을 도서관은 얼마간의 후원금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김미희 서울 성북구 '꿈터 어린이 도서관' 운영자는 "의욕적으로 출발한 소규모 도서관들도 지역 단체의 지속적인 협조를 얻지 못하면 문을 닫기 일쑤"라고 했다.
사정이 낫다는 구립 도서관도 넉넉한 것은 아니다. 도원 도서관 경우 관장을 포함 10명의 직원을 두고 있는데, 인건비 지출만 전체 도서관 운영예산(14억 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4억6천여만 원이다. 도서관 측은 "당초 요청한 예산의 절반이 깎인 수준"이라고 했다.
▶마을 도서관 만들어 볼까
마을 도서관 운영자들은 "의욕만 가지고는 안된다."고 조심스럽게 조언하고 있다. 운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영리성 확보도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부쩍 높아진 주민들의 문화적 기대치를 충족시켜야 하므로 마냥 '우리 마을 도서관 사랑'을 외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현재로서는 구립을 제외하고 순수 마을 도서관을 만드는 방법은 세 가지 정도. 각 동마다 있는 주민자치센터 공간을 활용하거나, 학교 도서관을 개방하거나, 아예 주민 스스로 공간과 기금을 조성하는 것이다. 관공서의 높은 문턱을 감안하면 세 번째가 현실적인 대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은 주민들 스스로 마을 도서관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이끌어낸 뒤 도서관 부지나 비용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함께 협의하는 편이 좋다. 추진위원회 구성이 필요한 것. 시민사회단체, 지역 기업, 관공서 등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얻을 수 있다면 더 큰 도움이 된다. 운영경비는 최소한으로 하되 많은 주민들이 계속 찾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수진 성서지역 좋은도서관만들기 엄마모임 대표는 "대구는 교육열은 높으면서도 도서관 공급은 턱없이 부족하다."며 "구청과 지역 교육청에서도 마을 도서관 건립 지원, 학교 도서관 활성화 등 대책을 마련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최병고기자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이철우 "안보·입법·행정 모두 경험한 유일 후보…감동 서사로 기적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