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이소! 2007 경북 방문의 해] ⑥대가야 역사 문화탐방-고령

입력 2007-02-27 07:34:08

'철의 왕국' 대가야 도읍지를 거닐다

유난히 짧았던 겨울의 끝자락을 밟고 고령으로 향했다. 일찍 찾아온 봄이 마중 나와 포근했다. 신비에 싸인 고령의 대가야사(史)는 베일에 얼굴을 가린 신부처럼 다소곳했다. 보일 듯 말 듯한 얼굴이 여행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다.

"가야천의 물이 넉넉하여 가뭄을 모르고 또 밭에는 목화가 잘 되어서 이곳을 의식(衣食)의 고장이라 일컫는다." (이중환의 택리지 중에서)

고령은 기후조건이 좋아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풍경은 규모가 작은 만큼 소박하면서도 운치 있어 보였다. 그 자연 속에 오랜 역사가 있었고, 그 역사 속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가깝고도 먼 고령 대가야

"전국에서 암각화가 가장 많은 문명의 본거지, 고대 문화를 꽃피웠던 대가야의 도읍지, 고도의 철제기술을 왜에까지 전수해 주었던 철의 왕국."

수사적 표현만 나열해 보면 고령은 남부럽지 않은 역사적 후광을 업고 있다. 하지만 대가야의 도읍지 고령은 일반인에게 그리 친근하지만은 않다. 신라의 수도 경주보다, 백제의 수도 부여보다 고령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학창시절 배웠던 국사교과서를 떠올려 보자. 고령의 대가야사가 소개된 페이지가 얼마였던가? 한때는 0.5쪽밖에 차지하지 못했고 지금도 겨우 2쪽 정도만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아직 미지의 세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적이나 유물이 없는 것도 아니다. 흔적은 곳곳에 있는데 고증할 만한 기록이나 문헌이 없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고령군은 알려지지 않은 대가야사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유적 보존과 개발뿐 아니라 다양한 역사현장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 양전동 암각화

이름에서부터 신화적 기운이 느껴지는 장기리 회천변의 '알터마을'. 양전동 암각화는 알터마을 입구에 위치한 나즈막한 바위 한쪽 면에 새겨져 있다. 보물 605호, 청동기 후기쯤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태양과 같은 동심원, 신의 얼굴을 본뜬 가면들이 북방을 등지고 있는 것이 아마도 그 앞에서 선사시대 사람들은 제사라도 지냈나보다.

고령 곳곳에는 이 같은 바위그림이 많이 남아 있다. 3km정도 떨어진 쌍림면 안화리에는 양전동 암각화와 유사한 제의적 분위기를 뿜는 암각화가 자리하고 있다. 또 쌍림면 산당리에는 하늘의 별자리를 그대로 옮겨 놓은 모양이, 운수면 월산리에는 농경사회를 상징하는 윷판 모양의 바위그림이 남아 선사시대 사람들의 삶과 욕망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 지산동 고분군

고령읍 지산리 '주산'의 능선을 따라 자리잡은 가야 최고(最古)의 고분군이다. 산책로가 완만하게 잘 닦여져 있어 정상까지도 쉽게 오를 수 있다. 아이들과 함께 천천히 쉬어가며 걸어도 1시간이면 충분하다.

이곳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발견된 순장묘 44호 고분을 포함해 크고 작은 200여 기의 고분들이 있다. 풍채가 거대해 무덤이란 생각보다 언덕배기에 가까워 보이는 것이 놀랍다는 표현밖에 나오지 않는다. 능선을 따라 올라가며 줄지어선 무덤이라니. 아무리 나지막하다 해도 산등성이에 무덤을 올리는 일은 쉽지 않았을 텐데….

알아보니 무덤 한 구에 1년 정도 걸렸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단다. 묘의 주인은 당연히 왕이나 귀족이다. 죽어서도 하늘과 가까워지려 했던 사람들. 자신이 부리던 하인들과 함께 땅에 묻혔던 사람들. 산 아래에서부터 구불구불 올라오는 거대한 고분들을 따라 그들이 누렸던 힘과 권세가 이어져오는 듯했다.

# 대가야 박물관, 왕릉 전시관

2005년에 개관한 대가야박물관은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구석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고령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구석기 사람들이 사용했던 돌칼과 돌화살, 고인돌 등의 원시문화 흔적이 고스란히 모여 있다.

300년대 이후 꾸준히 성장한 가야의 모습도 한 눈에 들어온다. 대가야국으로 불리며 전성기를 누리기까지의 과정, 탁월한 제철 기술로 농기구와 무기를 만들던 모습, 백제나 왜와 교섭하며 문물을 주고 받았던 기록 등을 생생하게 확인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순장묘를 그대로 재현한 왕릉 전시관이다. 국내 최초로 지산리 고분군에서 발굴된 순장묘 44호 고분(직경 27m, 높이 6m)의 유물을 그대로 복원해 둔 곳이다.

무덤 중앙에는 주인공이 누운 10m 길이의 으뜸방이 있다. 주변에는 주인공을 호위하거나 음식 및 자재 관리를 담당하는 사람의 공간인 돌방이 딸려 있다. 유골들을 감정한 결과 함께 묻힌 사람들은 어린아이에서부터 50대 노인까지 다양했고, 짐승의 뼈가 발견되기도 했다.

아무리 왕권이 강했다 하더라도 죽음에 대한 공포심까지 잠재울 수는 없었을까? 복원된 순장묘에서 죽음의 권리조차 갖지 못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고, 그 얼굴 위에 국가의 단계로 올라서지도 못한 가야의 최후가 오버랩됐다.

# 우륵 박물관

악성 우륵의 위업을 기리고 국악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한 곳. 우륵의 생애와 가야금의 기원에 관한 영상, 가야금·아쟁·해금 등 전통 국악 현악기들이 전시돼 있고 연주 코너도 마련되어 있다. 견학에도 관광에도 모두 유익한 곳이다.

우륵은 박연, 왕산악과 함께 3대 악성 중의 한 사람이다. 가야금을 만들었으면서 동시에 탁월한 작곡가이자 연주가이기도 했다. 당시 가야의 가실왕은 "각 나라의 방언이 다른데, 어찌 그 성음이 같을 수 있겠는가?"라며, 우륵에게 12곡의 가야금 음악을 만들게 했다고 한다.

"소리는 세상을 거쳐서 나오되 세상에 파묻히지 않는다. 네가 금을 한번 튕길 때, 없었던 세상이 새로 빚어지고 거기에 목숨이 실려서 흔들리는 것이다. 가야가 망해 없어져도 소리는 덧없이 남아서 흔들릴 것이다." (김훈의 현의노래 중에서)

우륵은 가야가 멸망할 무렵 제자와 함께 신라로 망명했다. 다르게 말하면 '소리'를 포기하지 못해 모국을 멸망케한 적국에 투항한 것이다. 조국을 버릴 만큼 우륵에게 소중했던 가야금의 소리를 감상하고 직접 연주해 볼 수도 있게 준비되어 있다.

# 그 외 각종 문화체험

곳곳에서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대가야박물관에서는 토기만들기(각각 택배 운송, 단체 예약시 가능, 1인당 1만 원), 가야금 배우기(단체 예약시 가능, 1인당 1만 원) 등이 준비돼 있다. 또 쌍림면 개실마을에는 엿 만들기, 찰떡 만들기(단체 예약시 가능, 1인당 5천 원) 등의 다양한 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이 준비돼 여행객들은 잠시도 심심할 틈이 없다.

김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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