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용의 현장리포트] 낮잠

입력 2007-02-22 16:11:05

외근 영업을 하는 회사원 정모(33)씨는 오전 8시쯤이면 직장에 도착해야 한다. 아침잠이 부족하지만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아침 식사도 거의 하지 못한 채 회사로 온다. 아침 회의가 끝나면 막바로 현장으로 움직인다. 오전에는 그럭저럭 버티지만 점심을 먹고나면 견딜 수 없는 피로감이 몰려온다. 사우나를 찾아서 잠시 잠을 청한다. 30분 정도만 자야겠다고 생각하지만 늘 1시간을 훌쩍 넘어선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것이 눈꺼풀이라고 했던가? 직장인들에게 낮잠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주부들도 마찬가지다. 나른한 오후시간, 집안 정리를 마치고 잠시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취하는 잠은 얼마나 달콤한지. 낮잠이 얼마나 필요하고,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를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쏟아지고 있다. 반면에 낮잠의 위험을 경고하는 연구도 많다.

◇ 낮잠의 건강학

최근 미국 하버드 대학과 그리스 아테네 대학 연구팀은 의학전문지 '내과학 기록'(Archives of Internal Medicine)에 발표한 연구논문에서 일주일에 3일 이상 30분 이상씩 규칙적으로 낮잠을 자는 사람은 낮잠을 전혀 자지 않는 사람에 비해 심장병으로 사망할 위험이 37%나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조사 대상은 20~86세 그리스의 건강한 성인 2만3천681명, 연구 기간은 평균 6.3년이었다. 이번 연구결과는 낮잠의 효용성을 증명하는 체계적인 근거라며 언론들마다 일제히 보도했다. 과연 그럴까?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디스데일 박사팀은 낮시간 졸림증이 심혈관 질환의 발병 위험을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낮시간 졸림증이 심할수록 심장 기능이 저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낮시간 졸림증을 가진 환자에서 심장 기능이 미세하게 손상돼 결국 졸림과 피로감을 더욱 유발해 생활 장애를 초래하게 된다."고 말했다. 앞서 두 연구는 낮잠과 심장이라는 공통 키워드를 갖고 있다. 즉, 졸리면 심장에 무리가 오고, 낮잠을 충분히 자면 심장에 주어진 피로도 풀린다는 말이 되겠다.

같은 결론처럼 보이지만 조금 다르다. 디스데일 박사팀은 낮시간 졸림증의 원인을 수면무호흡증이라고 했다. 자는 동안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깊은 잠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 수면무호흡증. 숙면을 취하지 못했으니 낮에 졸린다. 피로가 풀리지 않았으니 심장에 무리가 온다. 밤에 숙면을 취하면 낮에 졸릴 일도 없다는 뜻이 되겠다. 낮잠이 곧 해결책은 아니라는 해석. 수면무호흡증으로 밤잠을 못 잔 사람이 낮잠인들 깊게 잘 수 있을까?

미국 스탠퍼드 대학 윌리엄 디멘트 수면전문 교수도 지나친 낮잠이 때로는 불면증의 원인이 된다고 경고했다. 불충분한 숙면이 낮잠으로, 낮잠이 다시 불면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말이다.

◇ 낮잠 얼마나 자야할까

낮잠이 좋으니 나쁘니 논란을 벌이는데 앞서 가장 중요한 명제는 '졸리면 자야한다'는 것이다. 눈꺼풀이 내려앉는데 세수를 하고 체조를 한 들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의학적으로 낮잠은 개인적인 문제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낮에 졸리는 사람은 자야 한다는 말이다. 문제는 잠의 품질이다. 뉴욕시립 대학 매튜 터커 박사 연구팀은 낮잠이 기억력을 높인다고 밝혔다. 실험 대상자들에게 한 쌍의 단어를 기억하게 한 뒤 6시간 후 테스트를 했더니 1시간 정도 낮잠을 잔 그룹의 기억 점수가 15% 더 높게 나타났다고. 낮잠은 방음시설이 된 방에서 1시간 가량 자도록 했다. 이왕에 잠을 자려면 조용하고 어두운 곳에서 숙면을 취해야 한다는 말이다.

일단 낮잠 시간이 문제. 우리나라 직장인 상당수는 수면부족에 시달린다. 한 여론조사 결과, 직장인 10명 중 9명은 만성 수면부족에 시달리고 있으며, 대기업 직장인 중 95.9%가 주중 하루 평균 수면시간이 7시간 이하였다. 수면 전문의들은 4, 5시간 밖에 못 자는 생활이 계속되면 혈중 알코올농도 0.1%(면허취소)와 같은 상태가 된다고 말한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낮에 잠깐 자는 정도는 신체적'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낮잠은 얼마나 자야할까? 일본 노동성 산업의학종합연구소 조사 결과, 점심식사 후 15분 낮잠이 가장 효과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그 정도 낮잠을 잔 사람이 가장 뇌파반응 속도가 빨랐다는 것. 호주에서도 비슷한 연구가 있었다. 낮잠을 20~30분 이상 길게 잔 사람들은 30분 가량 무기력 상태에 빠져 오히려 업무능률이 떨어졌다고.

낮잠을 자는 환경도 중요하다. 질 좋은 수면에 대한 욕구가 증대되면서 낮잠까지 돈을 주고 사는 미국인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조용한 음향설비와 적당한 조명 등이 갖춰진 '낮잠 회사'의 경우, 20분 자는데 12달러(약 1만 1천 원)을 내야하고, 숙면을 취할 수 있는 반사치료까지 추가하면 65달러(약 6만 2천 원)다. 불빛이 있는 시끄러운 곳에서는 잠을 자도 피로가 회복되지 않는다. 깊은 잠이 들어야 근육도 풀어지고 정신 피로도 회복된다. 그렇지 못한 상태라면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오히려 몸만 찌뿌둥해질 뿐 쾌적한 기분을 느낄 수 없다. 물론 극도로 피곤한 상태라면 짧은 시간에 깊은 수면으로 빠져들 수도 있다.

아울러 습관성 낮잠은 좋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낮잠은 결코 밤잠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 인간은 신체리듬상 아침에 깨어난 뒤 8시간이 지나면 피로감, 즉 졸림을 느낀다. 오전 6시에 깼다면 오후 2시쯤 잠이 온다. 이때 10분 남짓 짧게 자면 피로 회복이나 업무 능률 향상에 도움이 된다. 대한수면의학회측은 "새벽 4시쯤과 오후 2시에서 4시 사이가 가장 졸린 시간이지만, 그렇다고 1시간 이상의 낮잠은 좋지 않다."고 충고했다.

아침부터 깨서 활동을 하면 밤에 잘 수 있는 호르몬이 조금씩 축적이 돼 밤에 잠을 잘 수가 있지만 낮잠을 자면 그 호르몬들이 다시 분비돼야 하므로 잠드는 시간이 늦어지고 결국 수면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

◇ 낮잠도 나라마다 가지가지

국가별로도 낮잠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달 30일 직장내 낮잠을 적극 권장하겠다고 밝혔다. 너무 긴 낮잠은 곤란하고 최대 15분까지. 이유는 매년 고속도로 교통사고의 20~30%가 졸음운전이기 때문. 직장과 학교내 저효율, 비만, 우울증도 수면부족 탓으로 보고 있다.

중국은 헌법에 '노동자들의 쉴 권리'를 명시해 낮잠을 보장하고, 일본은 기업 차원에서 낮잠 방이나 책상용 베개 등을 제공한다. 태국 방콕시는 아예 시청내 낮잠방을 설치했다. 시청 직원 200명 중에서 20명 정도가 점심시간대에 수면실을 고정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미국 뉴욕 등지에는 돈을 받고 잠을 재워주는 '낮잠 회사'가 성업 중이라고 한다.

반면 낮잠 문화의 대명사로 알려진 '시에스타'로 유명한 스페인은 2005년 말 시에스타를 폐지했다. 폐지론자들은 시에스타로 스페인 국내총생산(GDP)의 8% 가량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2004년 당시 스페인 GDP가 9천 914억 달러임을 감안하면 시에스타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800억 달러(약 76조 원) 정도가 되는 셈이다. 우리나라도 다를 바 없다. 아직 낮잠은 게으르고 무능력한 상태를 일컫는 대명사로 쓰인다. '예산이 낮잠잔다', '법안이 낮잠잔다'는 표현에서도 부정적 태도를 읽어낼 수 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