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사랑)홀로 아들키우다 뇌종양 선고받은 손병진씨

입력 2007-02-14 09:01:18

삶에 대한 부질없는 욕심 따윈 바라지도 않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썩어 들어가는 몸뚱이를 고칠 생각도, 조금만 더 따뜻한 방에서 눈을 붙일 염치도 부리지 않으렵니다. 제 아들 지훈(18)이 공부 잘하게 해달라고 바라지도 못하겠네요. 못난 아비인 것을 잘 알기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산 지 벌써 십수 년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저 이것 하나만은 포기하지 못합니다. 제 소원 하나는 지훈이가 스무살이 될 때까지만 제 숨통이 붙어있게 해달라는 것이지요. 세상에 나자마자 엄마 젖 한번 물려보지 못한 가엾은 제 아들에게 '고아'라는 짐까지 지울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오늘도 감히 기도합니다. 2년 만, 더도말고 2년만 제 목숨이 붙어있길···.

초등학교를 졸업한 저는 바로 목공소로 가 기술을 배웠습니다. 기술만 있으면 밥벌이는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알음알음 찾아갔지요. 10년 세월을 보냈습니다. 못 입고, 못 먹었지만 기술은 날이 갈수록 늘었고 스무살이 됐을 땐 사람들이 잘한다고 인정도 해줬지요. 그 즈음일겁니다. 훈이 엄마를 알게 됐고 유난히 부끄럼을 많이 타던 아내는 결혼식도 올려주지 못한 못난 남편을 따라 알뜰하게 살림을 살아줬습니다. 혼인신고만 한 채 사글세로 시작한 살림이었지만 우리는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하다 했지요.

하지만 달콤했던 신혼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늦은 밤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향하던 저는 마주오던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했고, 그 사고로 우리의 행복은 송두리채 날아갔습니다. 눈을 떴을 땐, 왼쪽 다리가 산산히 부서져 있었습니다. 병원에서는 그 충격으로 뇌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지만 수술을 포기했습니다. 출산이 임박했던 아내의 병원비만은 남겨둬야 했으니까요. 아내는 제가 병원에 있는 동안 쓸쓸히 훈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해산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절 돌보기 위해 병원을 찾아왔지요. 온몸이 퉁퉁붓고 얼굴빛마저 창백해진 아내의 모습에 전 죄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내는 말없이 떠났습니다. 잘 살아낼 자신이 없다던 아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던 아내는 저와 지훈이를 두고 자취를 감췄습니다. 막 태어난 아이를 맡아줄 곳도 없었고 아내 말고는 움직일 수 없는 절 간호해 줄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지요. 하지만 아내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힘이 들었을테니까. 그걸 이해할 수 있으니까. 다른 곳에서는 몸 편히 잘 살기를 바랐습니다.

교통사고로 장애1급 판정을 받은 저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지훈이는 앉은뱅이 아빠의 어설픈 손에서 자라게 됐지요. 하지만 무심한 하늘은 더 큰 고통을 주시더군요. 뇌수술을 포기했던 곳에서 뇌종양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3년 전에야 알았습니다. 산산조각났던 왼쪽 다리는 만성골수염으로 번져 잘라내야 한다는 얘기도 듣게 됐습니다. 당뇨마저 악화돼 수술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십년 전부터 약으로 연명했던 저는 그렇게 버텨왔고 이젠 2년만 더 견뎌내면 된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찾아듭니다. 성치 않은 몸에, 가진 것조차 아무것도 없는 아비 밑에서 힘겹게 살아준 우리 아들에게 고마울 뿐이죠.

13일 오전 11시쯤 대구 동구 효목동 자신의 집에서 홀로 투병 중인 손병진(45) 씨는 힘겹게 일어나 앉았다. 당뇨 합병증으로 몸 곳곳에 염증이 생긴 손 씨는 아들 생각으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었다. "우리 아들. 참 착한 놈입니다. 아비 생각해서 공고를 가더니 이젠 곧 실습도 나간다고 하더군요. 어찌나 대견한지···." 손 씨는 아들이 자립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안심이 된다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리 아들, 우리 아들만 일자리 찾으면 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손 씨는 죽음을 말하는 내내 담담함을 잃지 않았다. 십수년을 죽음의 그림자 밑에서 생활해 온 그, 하지만 세상 어느 누구도 그의 죽음을 막아주지는 못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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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미기자 bor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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