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아파트 공화국

입력 2007-02-10 07:40:34

아파트 공화국/발레리 줄레조 지음/길혜연 옮김/후마니타스 펴냄

"한강변의 군사기지 규모는 정말 대단하군!"

서울의 5천분의 1 지도를 본 프랑스 도시계획가의 말이다. 그들의 눈에는 그것이 군 벙커로 보였던 것이다. 나지막한 집들 사이에 폭 500-800m의 거대한 블록. 바로 반포의 아파트단지였다.

유럽에서 실패한 주거모델인 아파트가 한국에선 왜 이렇게 열망의 대상이 될까. 프랑스 지리학자가 한국 아파트를 파헤쳤다.

프랑스의 아파트단지는 '도시 폭력'과 '소외'를 상징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고층화, 고급화, 첨단화로 이어지며 '부(富)'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지은이는 부의 재분배 차이에서 나온 것으로 분석했다.

한국은 농경사회에서 급격한 도시산업사회로 전환하면서 양적 성장에 과도하게 집착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재분배 보다는 외향적 경제성장으로 치달았다. 프랑스와 같이 부의 이전이나 연대의식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 '국민주택'이 건설되지 않았다.

결국 부의 재분배를 국가가 맡지 않고 한국적 발전모델의 '압축적 표상'인 재벌이 끼어들게 되었다.

한국의 아파트는 국가-재벌-중산층 특혜 동맹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정부가 주도하고 재벌이 공급한 대단지 아파트를 도시 중산층이 수용하게 됐을 때 한국에서 아파트 신화는 시작된 것이다.

지은이는 "한국의 아파트는 중간계급 제조공장"이라고 했다.

70년대 초반까지 좋지 못한 이미지였던 아파트는 도시 중산층이 살게 되면서 이상적 주거 기준이 됐다. 권위주의 정부는 가격이 통제된 아파트를 대량 공급했다. 그래서 중산층을 대단지 아파트로 결집시키고, 이들에게 소유와 자산 증가라는 혜택을 주었으며, 그들의 정치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중산층은 도시 하층민과 공간적으로 분리되면서 심리적 상승효과를 느끼게 됐다.

지은이는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권위주의 산업화의 구조와 특성, 여기서 비롯된 계층적 차별 구조와 획일화된 문화양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이자, 그 산물이라 할 수 있다."고 정의했다.

그리고 한국의 아파트는 독특한 문화 특성을 보여준다. 서구적이면서도 한국적인 '역설의 공간'이다.

바둑판 모양으로 난 자동차도로는 대부분 미국 근린지역의 격자 형태를 띠고, 맥도널드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 등 상업 공간의 식민화가 '미국화'된 도시경관의 인상을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실내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고, 밥상을 옮기는 '한국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 미학적으로 어긋난 도시경관은 어떻게 할 것인가.

지은이는 프랑스에서 한국 사회를 연구하는 대표적인 젊은 연구자이다. 서울 아파트단지에 대한 연구로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 후 현재까지 마른-라-발레대학교 지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93년 처음 한국을 방문해 아파트 경비원의 면박을 받고, 무뚝뚝한 주민들의 문전박대를 당하며 논문을 썼다. 그녀의 박사학위 논문은 2003년 책(Seoul, ville geante, cites radieuses)으로 출간됐다. 제목은 우리말로 '빛나는 도시, 서울'이지만, 이는 역설적인 표현이다.

대규모 집합주택의 모델을 제시했던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1887-1965)의 이상을 상징하는 말이다. 프랑스에서 실패한 그의 이상이 한국에서 실현된 것일까.

지은이의 대답은 '아니다'이다. 대단지 고층아파트로 '빛나는 도시'가 됐지만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장기적으로 관리와 유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필연적으로 그 비용을 더 증대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도시 형태의 견고함을 취약하게 만들어, 프랑스처럼 쇠락의 길로 접어들거나, 아니면 현재 진행 중인 것처럼 일상화된 재개발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지은이는 "주택이 유행상품처럼 취급되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며 "대단지 아파트는 한국의 도시들을 오래 지속될 수 없는 하루살이 도시로 만들어내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272쪽. 1만5천원.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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