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방학이 시작되면, 습관처럼 강원도 일대를 떠돌곤 한다. 한해의 수업을 끝내고 난 다음의 까닭모를 허전함과 덧없음으로 어지러운 마음을, 동해바다 시린 파도소리는 말갛게 씻어준다. 이번 강원도행(行)에서는 깊어가는 강릉의 겨울 밤바다 소리를 들으면서 박제가의 를 읽었다. 강릉의 은은한 달빛을 물이랑에 머금고 밀려드는 파도소리들은 낮고 일정한 리듬으로 스러지면서 책속의 활자들을 내 눈 속으로 행복하게 밀어 넣어주었다.
겨울바다와, 그 파도소리와, 그리고 달빛 속에서의 책읽기는, 황홀했다!
박제가의 는 '세기말적 속도'로 변화해나가던 시대상을 따라잡지 못하고, 구시대적 삶의 습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조선후기의 '현실적 가난'에 대한 리얼리즘적 보고서이자, 그 타개책을 위한 복음서이다. 는 그래서 조선후기의 가난한 현실의 원인들, 일테면 생산성을 결여한 생활습속(검소함)과 관료체제의 불합리성 등등을 날카롭게 지적해 보인다. 또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타개책들, 예컨대 기술(수레/선박)의 정비와 중국어상용화를 바탕으로 한 중국과의 외교, 무역의 중시 등등을 제시해 보인다. 물론 가 몰락해가는 5백년 왕조에 대한 강한 위기의식에서 쓰이다보니, 무모하리만치 거칠고 촘촘하지 못한 생각들('중국화=문명화'의 등식)이 넘치기도 한다. 그럼에도, 에 내재된 현실 비판적 '뇌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우리 사회는 얼마나 구태의연한 명분과 습속으로부터 벗어나 있는가, 우리의 교육은 또 얼마나 현실 중심적이고 실질 중심적인가?
예컨대 학생들이 다양한 여행과 생활경험을 통해 다양한 견문을 습득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방학'은 끝내 과외와 보충의 이름으로 수업의 연장이 되어 채워지고, 학생들의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사고계발을 위해 시작된 '논술교육'은 이미 '시장'에 비자율적으로 흡수되어 그 실효성이 점점 의문스러워져만 갈 뿐이다. 또한 그러한 교육 환경적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은 실질과 현실을 중시하는 전공분야보다 안정과 명분을 중시하는 전공분야로 집중된다. 도전하고 새로운 길을 '창조하고 배우려는 자'들보다는 기존의 길을 '반복하고 가르치려는 자'들이 넘쳐나는 우리사회는, 그리하여 얼마나 실질중심의 현실주의적(Realistic) 사회인가?
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조선의 도자기'를 언급한 부분이었다.
- 중국의 도자기는 바닥이 깨끗하고 얇은데, 조선의 도자기는 바닥이 울퉁불퉁하고 두껍기만 하다. 그래서 상위에 놓거나 물을 따르면 쓰러지곤 해서 쓸모가 적다.
단순화에 따른 많은 논리적 오류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조선은 어쩌면 '도자기' 하나를 제대로 만들지 못해 몰락해 갔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제가가 말하는 '도자기'는 한 시대가 반드시 성취해야 할 시대정신이며, 실현시켜야 할 실학정신일 것이다. 집을 그림에 있어 '지붕을 먼저 그리기를 가르치는 우리의 교육'은 '주춧돌부터 놓는 집 짓는 실제 순서'와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가!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만들어야 할 '도자기'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우리는 '우시 시대의 실학정신'을 도자기처럼 구워내고 있기는 한가?
를 읽는 강릉의 밤은 깊어갔다. 겨울 밤 파도소리가 시리게 들려왔다.
김상묵(포항제철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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