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다가오는 '풍요의 여신' 안나푸르나
밤새 퍼붓던 빗줄기가 겨우 숨을 고른 아침, 베시사하르로 가는 버스를 탄다. 장마철에다 불안한 정국 탓에 카투만두를 오가는 길목인 뉴 버스 파크(New Bus Park) 터미널은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안나푸르나 일주 트래킹의 전진 기지로 향하는 버스였지만 외국인 여행자는 혼자다.
출발 시간을 거의 한 시간을 넘기고 나서야 출발한 버스는 신문이며 과일, 생수를 소리쳐 파는 행상들을 뒤로 하고서야 비에 흠뻑 젖은 카투만두를 벗어난다.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버스는 굽이진 천 길 낭떠러지를 안은 찬드라기리 고개(Chandragiri Pass)를 내려간다.
거의 한 시간 이상을 삐걱거리며 내려가던 버스가 거친 숨소리를 내려놓은 곳은 마르상디(Marsiandi) 강이 흐르는 곳에 자리한 휴게소다. 휴게소라고 해봐야 버스 서너 대가 주차할 공간에 음식과 차, 과자를 파는 가게가 있는 작은 공간이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하고 까마득한 길을 위태롭게 내려온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안도의 숨을 내쉬게 하는 피안의 땅이다. 가이드에게 행선지를 묻던 종업원이 여행자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운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코스는 보통 세 가지로 나뉜다. 그 중 하나는 네팔 제2의 도시 포카라 (Pokhara)를 거쳐 푼힐(Poon Hill,3193m) 전망대를 올라 안나푸르나 산군(山群)을 바라보는 일주일 코스로 짧은 시간에 트레킹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주로 선택하는 길이다. 또 하나는 이주일 남짓 걸리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다녀오는 코스로 가장 일반화된 길이다. 이 역시 포카라에서 출발하여 포카라로 돌아오는 코스다.
다른 하나는 안나푸르나 라운딩 트레킹으로 보통 이십오일 이상이 걸리는 강행군의 길이다. 베시사하르를 출발하여 가장 난코스인 쏘롱(Thorung,5416m)고개를 넘어 포카라로 오는 일주(一周) 코스는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매력적인 길이다. 하지만 산사태와 고산병을 극복해야 하는 만만치 않은 길이기에 두터운 안경에 작은 키, 더구나 아주 마른 체격인 여행자가 혼자 이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종업원이 못미더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카투만두를 떠난지 여섯 시간 만에 베시사하르에 닿는다.
마흔을 넘기고서 어린 왕자를 꿈꾸는 어리석음에 찾은 안나푸르나는 얼핏 비에 젖어 있다. 세상을 바꾸겠노라는 꿈을 꾸었던 젊은 날이 있었다. 그 열정을 먹고 사는 문제로 맞바꾼 오늘, 여행자는 신의 영역인 히말라야에서 왜냐고 다시 묻고 있다. 지키지 못한 열정에 대한 부끄러움일까? 사람에 대한 뜨거운 애정 때문일까? 아직도 내려놓지 못한 번민이 등에 진 배낭보다도 무겁다.
베시사하르에서 두 시간 남짓한 쿠디(Khudi 790m) 마을에서 숙박을 하기로 하고 체크 포스트에서 입산 허가서에 도장을 찍는다. 사무원은 여행자의 국적을 보더니 이틀 전 한국인 여자 세 사람과 남자 한 사람이 올라갔다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쿠디까지 가는 버스는 하교 길의 아이들과 한껏 멋을 부린 젊은 처녀들, 그리고 베시사하르에서 장을 보고 가는 사람들의 닭과 염소들로 가득 찬 그야말로 동물 농장이다. 염소의 울음소리에 놀란 닭이 푸드득 거리며 깃털을 날리지만 어느 누구도 불편해 하거나 찡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들과 처녀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노인들은 그저 빙긋이 미소를 짓는다. 이들에게 사람과 동물의 경계는 의미가 없어 보인다. 더불어 사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과 자연, 모두와 함께 하는 것이다.
버스가 갈 수 있는 마지막 마을인 쿠디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안나푸르나 깊은 마을까지 짐을 실어 나르는 당나귀 행렬을 만난다. 당나귀들은 쌀과 소금, 그리고 건축자재까지 사람들에게 필요한 다양한 생필품을 실어 나르고 있는 중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연신 방울 소리를 따라가는 당나귀 행렬 뒤로 등짐을 힘겹게 진 이들이 함께 하고 있다. 슬리퍼를 신고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짐을 진 사람들의 유난히 좁은 어깨 위로 버스를 따라오던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있다.
어둑해진 산길을 걸어 닿은 쏘롱라 게스트 하우스는 작은 꽃밭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롯지다. 짐을 풀고 저녁으로 달 밧(Dal bhat)을 시킨다. 달 밧은 네팔인의 주식으로 쌀밥에 녹두 스프 그리고 무를 젓갈에 절인 일종의 네팔 김치인 어짜르가 나오는 정식으로 밥과 반찬을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있어 가난한 여행자들이나 네팔인들에게는 고마울 수밖에 없는 음식이다.
"안나푸르나가 무슨 뜻인지 아세요?"
능숙하게 손으로 쟁반 위의 밥을 말아먹던 가이드 유진이 묻는다.
"'안나'는 '곡식'이고 '푸르나'는 '가득한'이란 뜻이죠"
하얀 설산을 거느리고 있는 안나푸르나 산군의 모습이 마치 흰 쌀밥을 담은 모양을 닮아서 그 이름이 지어졌다며 웃는다. '풍요의 여신'이라는 이름보다는 '모든 먹을 것'을 뜻하는 안나푸르나의 뜻이 훨씬 마음에 와 닿는다. 정말 그 뜻처럼 안나푸르나는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나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오늘도 먹을 것을 제공하고 있다. 불빛 한 점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마르상디 강이 소리를 내며 흐른다. 얇은 판자로 만든 벽 사이로 가이드와 포터의 코고는 소리에 몸을 뒤척이다가 깜빡 잠이 든다.
밤새 내리던 비가 거짓말처럼 그쳤다. 계란 부침과 밀크 티로 아침을 때우고 바훈단다(Bahundanda)로 향한다. 바훈단다는 해발 1,310m에 위치한 마을로 힌두어로 '브라만 사람들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계곡 사이에 놓인 구름다리를 건너자 숨을 턱까지 차게 하는 오르막이 계속이다. 더구나 그 길은 소와 당나귀와 같은 짐승들의 오물과 뾰족한 돌부리로 눈길을 돌릴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설산은 수줍은 새색시 마냥 얼굴을 구름으로 가리고 있다.
결국 한눈을 팔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인 길을 거의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서 마을에 도착했다.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씻으며 배낭을 내려놓는다. 발끝에 자리한 계단식 논들이 허허롭다.
그렇다. 빠르게, 또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달려온 시간의 틈바구니 속에서는 그저 살아남는 것만이 선일 수밖에 없다. 살아남지 못하는데 무슨 놈의 나눔이며 사랑이냐고 세상은 소리친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가지는 것에 집착하지만 저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과연 옳은 것인가?"라는 물음에는 선뜻 답하지 못한다. 바로 여기에 히말라야가 있다. 먼저 달려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길, 오히려 가진 것이 짐이 되는 길, 잊고 있었던 것들을 일깨우는 투명한 햇살을 가진 사람들, 해서 여행자는 희망을 만나고 있는 중이다.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에베레스트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푼다. 태양열로 데운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 날아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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