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라는 직업은 매력적이다. 하얀 가운이 그렇고, 그네들이 가진것이 그렇고, 늘상 내뱉는 알아듣지 못하는 전문용어도 그렇다. 요즘 말로 옮기면 '럭서리' 해 보이기 까지 한다.
가끔 너무 잘난 척 하는 것같아 배알이 꼴리고, '그렇게 똑똑하셔'라며 비아냥거리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병원에 간다. 마음 졸이며 그들의 한마디에 일희일비하고, 행여 그들의 숨겨진 뒷이야기가 대중매체를 통해 전달되면 괜한 호기심까지 발동한다.
특히 외과의사는 매력을 넘어 신비감마저 더한다. 드라마, 영화, 소설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은 어김없이 외과의사들이다. 동네에 수많은 내과, 소아과, 치과는 놔두고 하필이면 외과일까? 하루가 머다하고 피 냄새 맡아가며 '칼질'을 하는 외과의사들. 속된 말로 스스로를 '칼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지만, 오히려 그 속칭 때문에 더 매력적인 사람들.
수술실에서, 응급실에서, 그리고 드라마와 소설 속에서 그들을 만났다. 일견 과장되고 왜곡된 측면도 있지만 그들의 삶은 너무도 인간적이었다. 취재 중 만난 한 외과의는 말했다. "우리도 사람입니다." 그 뜻을 충분히 알 것 같으면서도 내내 곱씹게 된다.
◇ 여기는 수술실
오전 9시, 비록 겨울이지만 아침 햇살이 제법 온기를 뿌리고 있었다. 하지만 따스함을 느낄 여유가 없었던 탓일까? 스산한 마음에 어깨를 부르르 떨고는 '붉은 거탑'마냥 우뚝 선 경북대병원 본관 입구에서 한동안 망설였다.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붉은 색 건물이 마치 들어올테면 와보라고 으름장을 놓는 것만 같았다. 외과의사들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다는 말에 수술실 탐방을 제안 받고 덜컥 그러겠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마뜩잖았다.
TV나 영화에 등장하는 수술 장면만 보고도 고개를 돌려버리는 심약한 성격에 구토라도 한다면 얼굴도 못 들고 다닐 판이다. 괜한 호기를 부렸나싶어 지금이라도 약속을 취소할까 고민하던 찰나, 외과 정호영(47) 교수가 본관 접견실로 들어왔다. 이제는 꼼짝없이 수술실로 끌려가야할 형편이다. 태연한 척 표정을 가다듬고는 환자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60대 남자 환자입니다. 위암이구요, 다행히 초기에 발견되었고 위치도 위의 아래쪽이라 부분절제술로 일부를 잘라내면 일주일쯤 뒤엔 퇴원할 수 있을 겁니다." 수술실로 향하는 복도는 길었다. 아니 길게만 느껴졌다. 입구에서 비밀번호를 입력한 정 교수는 손등정맥인식기에 손을 내밀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 그리고 누구도 들어가고 싶지 않은 곳. 그곳에 외과의사들이 있었다.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고, 탈의실에서 속옷만 남겨둔 채 홀랑 옷을 벗은 뒤 수술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다시 몇 개의 문을 통과해 도착한 수술실. 마스크를 썼지만 순간 피내음이 물씬 느껴졌다. 착각이다. 20개 수술실 곳곳에서 한창 절개와 치료, 봉합작업이 이뤄지고 있었지만 우려했던 핏빛 흔적은 눈에 띄지 않았다. 자동 알코올 분무기로 1차 손을 소독한 정 교수는 17번 수술실로 들어섰다. 낯선 사람의 등장에 수술실 사람들은 일순 긴장한 눈빛으로 술렁였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전신 마취상태로 수술대 위에 누운 환자는 이미 개복(開腹) 상태였다. 집도의 정 교수가 입실하기 전, 임상 교수와 레지던트들이 핵심 수술절차만 남겨놓은 상태로 준비를 완료했기 때문이다. 만약 9시에 수술이 시작된다면 대개 환자는 마취 등 준비를 위해 8시쯤 수술실로 들어선다. 레지던트들은 수술실 세팅을 위해 늦어도 7시30분 전에 입실해야 한다. 2차 소독을 마친 뒤 수술 장갑을 낀 정 교수는 준비가 잘 됐다며 스태프(staff)들을 칭찬했다.
드디어 본격적인 수술 시작. 수술실에는 집도의, 임상교수, 레지던트, 인턴 한 명씩과 간호사 2명이 있었다. 위 절제 수술은 3시간이 채 안 걸린다. 배를 열고 닫는데만 1시간, 집도의가 주도하는 위 절제에 1시간 반 가량 걸린다. 실제 위를 잘라내고 다시 이어주는 시간은 훨씬 짧지만 그 전에 위와 연결된 림프절이며 혈관을 일일이 잘라내고 묶어주고 전기소작기로 태우는 작업에 상당 시간이 할애된다.
"워낙 초기 단계라 암 조직이 손으로 만져지지는 않네요. 나중에 절제한 뒤에 보여드리죠." 정 교수는 수술진 뒤편에서 멀뚱히 서 있는 기자가 마음에 걸렸던지 수술 과정을 조심스레 설명해줬다. '굳이 볼 필요는 없는데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 찼다가 내려갔다. 사실 그 때까지 기자는 수술진들에 의해 가려지는 것을 핑계 삼아 환자를 일부러 외면하고 있었다. 내장을 다 드러내놓은 모습을 바로 곁에서 보기란 적잖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런 기자를 정 교수가 수술대 옆으로 불러들였다.
"현재 위 모양이 이런 상태인데, 아래쪽에 암 조직이 있기 때문에 여기부터 아래쪽을 전부 절제할 겁니다." 비위가 상할까싶어 잔뜩 긴장했던 기자는 깜짝 놀랐다. 오히려 마냥 신비롭게 느껴졌다. 심장 박동에 밀려 미세하게 진동하는 장기들, 그 옆에 놓인 여섯 개의 손, 또 그 손에 잡힌 수술도구들. 마치 손과 손들이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일을 지시하고 따르는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랬다. 이곳에선 자칫 위태로울 수 있는 생명줄을 놓고 아직 보이지 않는 암 세포와 팽팽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짐짓 태연하게 수술을 집도하고,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수술과정 하나하나에 필요한 도구들을 빠르게 건네주는 의사와 간호사들. 이곳에서 징그러움을 느낀다는 건 생명에 대한 모독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수술실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바이탈사인(vital sign : 호흡, 맥박, 혈압, 체온)을 보여주는 기계는 규칙적으로 '삐익 삐익' 소리를 내며 환자가 안정된 마취상태임을 알려왔고, 그 옆에 놓인 산소호흡기, 환자 정보를 보여주는 컴퓨터까지 하나하나 눈에 띄었다. 그리고 비로소 환자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너무나 평안하게 잠든 모습. 과연 이 사람은 어떤 상황이 진행되는지 알고는 있는 것일까? 절로 숙연한 마음이 들어 기도를 했다. 수술이 잘 되도록, 암 세포를 다 없애도록.
수술실에 들어온 지 30분 정도 지났을 무렵, 정 교수가 말했다. "이제 위 절제와 문합을 시작합니다." 팽팽한 긴장 속에 침묵이 흘렀다. 치열한 침묵 속에 시간도 흘렀다. 15분~20분 정도 지났을까? 육지로 떠내려 온 해파리마냥 축 늘어진 위 조직이 떨어져 나왔다. 그렇게 위의 남겨질 부분과 십이지장을 먼저 연결한 후 마지막 단계로 위 절제를 끝낸 정 교수는 기자를 옆으로 불렀다. 분홍빛 위와 그 옆에 붙어있는 암갈색 핏줄, 그리고 노란색 림프절 조직들이 묘한 색채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잘라낸 주머니 모양의 위 조직을 절개해 편평하게 펼쳐보였다. 거즈로 피를 촘촘히 닦아내자 그제서야 암 조직이 눈에 들어왔다. 정상조직에 비해 좀 더 주름이 깊다는 정도의 차이. 크기는 지름 1cm도 채 안됐다. 바로 이 암 덩어리 때문에 전체 위의 2/3를 잘라냈고, 그 곁에 붙어있는 림프절을 포함한 상당 크기의 조직마저 제거해야 했다. "잘라낸 조직은 병리과로 보내어 다시 현미경을 보면서 자세한 조직검사를 하죠. 대개 40~70개 정도의 림프절을 검사해서 전이된 암세포를 찾습니다. 다행히 이 정도 상태라면 다른 곳으로 전이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
그렇게 수술은 끝났다. 정 교수는 스태프들에게 마무리를 부탁하고 수술실을 나섰다. 기자도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취재에 응해줘서 고맙다는 뜻이 아니었다. 암 덩어리와의 전투에서 승리한데 대한 고마움이었다. 그리고 존경이었다.
이웃 수술실에서는 외과 과장인 유완식 교수가 복강경 수술을 진행 중이었다. 배를 절개하지 않고 모니터로 내부를 들여다보며 하는 수술. 모니터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수술실은 비교적 어둑어둑한 분위기였다. 옆 방에서는 새벽에 응급실로 실려온 80대 할머니 수술이 진행되고 있었다. 새벽 6시에 시작한 수술은 오전 11시를 넘겨서야 마무리단계로 접어들었다. 대동맥이 터진 상황이다보니 수술실 바닥은 온통 피투성이었다. 집도의의 수술복이며 발가락 사이사이에 피가 엉겨붙어있었고, 바닥 곳곳에 피로 찍힌 슬리퍼 자국이 선명했다. 피 비린내가 마스크 사이로 스며들었지만 결코 역겹지 않았다. 수술실 곳곳에서 생명을 위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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