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세상] 언니가 간다

입력 2007-01-18 16:51:01

시간을 되돌이켜서라도 바꾸고 싶은 과거가 있다면? 아니 바꾸고 싶은 과거와 직면하게 되는 나이, 당신은 몇 살 때 처음 과거에 대해 뼈저리게 후회해보았던가? 영화적 관습 속에서 어느 새 익숙해진 소재, 시간 여행.

'언니가 간다'는 과거의 불변성과 시간의 일방향성 앞에 놓인 한 노처녀의 시간 여행을 그려내고 있다. 노처녀 '나정주'는 현재를 뒤엉키게 한 과거 한 시점 매듭을 찾아 과거로 되돌아간다. 철없는 고교생 '나정주'에게 먼 미래에 있을 행복을 예비해주기 위해 서른 살 나정주가 '언니'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의미심장한 것은 바로 현재의 나정주가 서른 살 여자라는 사실이다. 서른, 과연 왜 서른은 과거에 대한 집착과도 같은 향수로 채색되는 것일까?

이립이라는 말이 암시하듯 서른은 뜻을 세워 자신의 이름을 새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서른 정도 되면 '학생'과 같은 중립적 호명 안에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대학생이라는 허울 좋은 울타리도 여자 스물 넷, 남자 스물 일곱이면 끝. 세상은 이제 서른 즈음의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제시하라고 요구한다. 디자이너라거나 교사, 펀드매니저와 같은 번듯한 명함에 새겨진 이름들 말이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하게 서른 즈음의 사람들에게는 연봉이나 인센티브와 같은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빛나는 외모도 화려한 몸매도 이제는 모두 참조사항일 뿐, 서른 쯤 되니 세상이 요구하는 것은 증명 가능한 숫자와 문자들 뿐인 셈이다.

김창래 감독이 그려내는 서른 살 나정주의 삶도 다르지 않다. 나정주는 서른 쯤이면 가지고 있으리라 여겼던 그 당연했던 미래의 조감도 중 어느 하나도 채워넣지 못하고 있다. 디자이너가 되려했지만 패션쇼 보조로 일할 뿐이고, 그도 아니면 멋진 선배와 결혼해 우아한 주부로 살아갈 줄 알았지만 이 역시 요원하다. 애인도 없이 변변한 명함하나 가지지 못한 나정주, 그녀 앞에 과거 추억 속 한 남자가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정주 앞에 나타난 남자는 바로 그녀를 짝사랑 했던 태훈, 범생이에 촌스러워서 그의 마음을 알아주고 싶어 하지도 않았던 남자, 그가 억대 연봉의 CEO로 나타난 것이다. 서른 살 나정주는 과거에 날라리 선배가 아닌 모범생 태훈에게 마음을 주었더라면 현재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 낙담하고, 그 와중에 시간 여행의 기회가 주어진다.

과거를 고치기 위해 17살 때로 돌아간 서른 살 여자, 어쩌면 '언니가 간다'에 형상화된 과거 교정술 혹은 시간 역주행은 현재의 삶에 만족할 수 없는 성인 여성들의 환상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삶이 불만족스러울 수록 시선은 오지 않은 미래가 아닌 지나간 과거에 대한 회한과 추억 속에 붙들려 있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니가 간다'는 삼십대 초반 싱글 여성이 지니고 있을 법한 보편적 불안에 호소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일도, 결혼도, 연애도 모두 심상치 않은 동년배 여성들에게 영화는 따뜻한 위로의 시선을 건네주고자 한다. 과거로 돌아간 나정주가 결국 아무런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 역시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영화는 과거란 지나간 추억일 뿐,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며 불변의 전제라는 오래된 전언을 향해 나간다. 삼십대 여성, 로맨스, 시간 여행과 같은 상투적 소재 속에서 '언니가 간다'는 90년대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세밀한 추억들로 형형하다. 듀스, 모뎀 통신, 게스 청바지와 같은 기표들 속에서 지나간 90년대가 아련한 과거로 재조명되는 것이다. 잊혀져 갔던 과거의 삶과 조우할 수 있는 기회, 이것이야말로 시간 여행 영화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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