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형에게
이틀을 꼬박 앓았습니다. 숙소의 젊은 내외가 번갈아가며 뜨거운 물을 날랐지만 뼈를 파고드는 추위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죽음처럼 긴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해발 3,505m나 되는 레의 높이를 우습게 본 탓입니다.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싣고 이틀 동안이나 험한 고갯길을 오르내린 피로를 풀기도 전에 가진 종교적 갈등에 대한 선입감을 나무라는 것일까요? 레는 그렇게 여행자를 누릅니다. 고산병이라면 레를 떠나야 했지만 다행히 겨우 몸을 추스르고 보온 물통을 사러 나갑니다. 두터운 외투를 두른 여인들이 거리에 앉아 채소를 팔고 있습니다. 그들 앞에 놓인 감자와 토마토 그리고 무와 같은 야채들이 눈에 밟힙니다. 그녀들 뒤에 자리한 환전소와 인터넷 카페, 화려한 장식품을 파는 가게는 증축되고 있지만 야채는 풀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이 변해가는 것은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들은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지 않겠지요. 오히려 과거는 가난이라 치부되고 애써 잊으려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재의 부는 기억될 수 있을까요? 그녀들 앞에 놓인 작은 토마토는 나눌 수 있으되 그녀들을 가리고 있는 건물의 그림자는 나눌 수 있기나 한 것일까요? 행여 저 같은 여행자들이 개발을 부추긴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여행자들은 다른 이들보다도 앞서 지구 상 마지막 샹그리라를 보아야 한다는 욕심에 사로잡혔는지도 모릅니다. 그 욕심이 결국 개발을 부추기고 레라는 도시를 물신의 산물로 만들게 말았다는 것을 망각한 채 세상을 향해 또 떠든 것이지요. 그래서 영원한 아웃사이더의 눈에는 레의 곳곳에 널려 있는 개발의 이름이 아프기만 하고 여행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것이지요. 길은 오랫동안 사람들을 이어주고 삶을 윤택하게 했지만 사람들은 그 길 위에서 집착과 소유를 부추기고 말았습니다. 길 위의 삶이란 길을 찾는 것입니다. 해서 여행은 늘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현지인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지켜갈 때 여행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점심을 먹기 위해 찾아 간 곳은 티벳인 부부가 경영하는 한국 식당입니다. 닭백숙에, 김치전, 만둣국, 라면에 김밥까지 다양한 한국 음식 차림만큼이나 주인장의 얼굴은 웃음으로 넉넉합니다. 식당 한편에서 입장료를 내지 않고 사원을 들어가는 방법을 한국 여학생들이 자랑스럽게 떠들어댑니다. 내뱉는 말끝마다 이곳 사람들을 얘들이라 칭하는 그녀들의 선민의식이 놀랍습니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여행정보들이 그렇듯 그녀들에게도 얼마나 값 싼 여행을 했는가가 자랑이 되고 가치 판단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녀들과 같은 이들을 위해서 레는 변하고 있습니다. 월드컵 경기를 보여주기 위해 레스토랑들은 대형화면을 갖춘 프로젝터를 준비하고 인터넷 카페들은 빠른 속도를 자랑하며 그야말로 점령군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과연 레에서 오래된 미래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정말 어리석고 부질없는 것일까요? 그냥 죄를 짓고 있는 느낌입니다. 레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사람들은 다 떠나버리고 이제 레는 사람들에게 막 자본의 거친 위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 역시 레를 이렇게 만들어 가고 있는 사람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쉽게 흥정을 하고 또 너무나 쉽게 여행을 이야기 하다가 떠나 버리고 나면 그 뒤에 남는 것은 샹그리라가 아니라 사람들의 상혼만이 어지러이 남게 되는 부산한 휴양지가 되고 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달아나듯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레의 번잡함이 싫었고 사람들의 충혈된 눈이 싫었고 그 무엇보다도 레가 변하게 될 모습들이 싫었습니다. 인연이 아닌 듯 같았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악연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에 새벽 일찍 레를 떠났습니다. 인더스 강을 따라 서 있는 곰빠(Gompa 사원)들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회색빛으로 흐르는 인더스 강물과 풀 한포기 제대로 없는 황량한 새벽 들판은 오히려 위안이 되었습니다. 가끔 스치듯 지나는 탑들과 커다란 마니차가 없었더라면 사람의 흔적조차 느끼지 못한 그런 길을 차는 달리고 달렸습니다.
헤미스 곰빠(Hemis Gompa)에 닿았습니다. 헤미스는 종교적 논란이 많은 사원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예수의 열두 살부터 서른 살까지의 행적이 기록된 책이 발견된 곳이라는 이 사원은 "온정 있는 자들의 외딴 장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의 행적을 담은 그 책이 오늘 날까지 전해진다고 하더라도 논란이 있었겠지만 사라진 기록이기에 오히려 입에 오르내리는지도 모릅니다. 진정 예수께서 이 사원을 다녀가셨던, 아니던 그 사실 여부는 확인할 노릇도, 확인해야할 의무도 없습니다. 다만 불교의 자비와 기독교의 박애는 결국 하나라는 생각은 여행자의 불경(不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요? 헤미스 곰빠의 승려들은 세간의 논란에 개의치 않고 매년 열리는 가면(假面) 춤 축제, 세-추(Tsc-Chu) 연습에 여념이 없습니다. 북과 징이 울리는데도 개 한 마리가 잠들어 있습니다. 개의 자리를 개의치 않는 스님들과 스님들의 움직임을 개의치 않는 개의 단잠, 어쩌면 깨달음은 일상에 있을 법 합니다. 동자승들이 사원 밖의 가게를 기웃거립니다. 아직까지 그들에게 춤 연습은 지루한 시간이겠지요. 사원 뒷산에 걸려 있는 룽다가 바람에 소리를 내며 웁니다.
거친 바람의 끝에 우뚝 솟은 띡세 곰빠(Thikey Gompa)는 아름답습니다. 이층 건물에 모셔진 미륵불상 앞에서 형형한 눈빛을 가진 승려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랬을까요? 어느 날 밤, 그에게도 불현듯 심장을 긋고 지나가던 들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을까요? 그 소리에 이끌려 그와 여행자는 이렇듯 억만 겁의 인연으로 만나게 된 것일까요? 한 무리의 동자승들이 줄을 지어 인근의 학교로 향하고 있습니다. 먼지가 날리는 운동장에 축구가 한창입니다. 동자승들의 붉은 가사가 설산에 핀 동백 같습니다.
세 곰빠(Shey Gompa)까지 2km 남짓 떨어진 길을 걷습니다. 회색빛 강물이 가끔 얼굴을 비칠 뿐 바람만이 동행인 쓸쓸한 길입니다. 얼마나 걸어야 닿을 수 있을까요? 아니 닿을 수 있기나 한 것일까요? 제가 가고 있는 길은 옳은 것일까요? 전 왜 여기에 와 있는 것일까요? 길이 답을 줄 것이라고 믿고 떠났지만 길은 아직도 아무런 말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가끔 바람만이 거친 소리를 내고 있을 뿐입니다.
"줄래"
도로를 넓히고 있던 사람들이 돌에 무디어진 정을 불에 달구며 안녕이라는 뜻의 인사를 건넵니다. 추위와 외로움에 떠는 낯선 여행자에게 뜨거운 밀크 차와 비좁은 비닐 천막의 자리를 양보하는 그들의 맨발에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져 옵니다.
L형!
어쩌면 레는 더 이상 샹그리라가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가난한 여행자에게 그들이 가진 작은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는 한 유목민의 꿈인 여행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겠지요. 이제 저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레를 떠납니다. 풍요의 여신이라는 이름을 지닌 안나푸르나로 갈 예정입니다. 그저 높고 넓은 설산을 보며 천천히 걷고 또 걷고 싶습니다. 그리움으로 목이 말라 정녕 견딜 수 없을 즈음에서야 돌아옴을 기약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어린 왕자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히말라야의 강물이 쾅 쾅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습니다.
전태흥 (주)미래데이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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