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권의 책] 강빈/박정애

입력 2007-01-11 09:39:20

한 여자가 있었다. '성품이 흉험하고 행실이 좋지 않았다. 이재를 추구하여 재물을 모았고, 그 재물로 사람을 잘 유인했다. (소현)세자가 무부(武夫)와 노비들을 가까이 하여 화리만을 추구하고 서양 문물에 혹하는 등 많은 잘못을 범한 것은 대개 이 사람 탓이다. 세자가 병이 있는데도 잠자리를 같이 할 정도로 음란하고, 임금의 처소 가까이에서 큰소리로 발악할 정도 불순하고 거셌다.'

조선왕조실록이 이렇게 평가하는 여성은 인조의 며느리자 소현세자의 아내 강빈(1611∼1646)이다. 그녀는 병자호란 때 남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가 9년 만에 귀국했다. 귀국 두 달만에 남편은 의문의 죽임을 당했고, 강빈은 다음 해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인조실록은 강빈의 죽음에 대해 '죽어 마땅하기에 죽였다.'는 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눈에 '죽어 마땅한 여인'이 작가 박정애의 눈에는 다르게 비친다.

강빈은 인질의 처지였으나 눈물로 세월을 보내지 않았다. 그녀는 청나라 볼모 생활 중에 경영 즉, 돈벌이에 나섰다. 당시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로 잡혀간 조선인 일행은 192명. 이 대식구의 식생활을 해결하는 것만 해도 커다란 문제였다. 게다가 당시 심양의 남탑 거리에는 조선인 포로를 매매하는 노예시장이 열렸다. 돈만 있으면 이들을 속환(贖還)할 수 있었다. 강빈은 이들을 구할 수 있는 수단이 돈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던 것이다.

강빈은 청나라에서 가마보다 말을 편하게 생각했으며, 대규모 영농과 국제 무역을 주도하는 경영가로 성장했다. 인질 생활 중에도 왕손과 공주를 낳았다. 소현세자가 천주교와 서양을 받아들이는 개방주의자로 변화한 것과 같은 맥락의 변화였다. 이들 부부가 귀국해서 왕위를 계승했더라면 조선은 변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선이 어떤 나라인가? 진작 망했어야 할, 그러나 망할 시기를 놓친 이 불우하고 염치없고, 열등감에 사로잡힌 나라는 그 나약한 본질 때문에 이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 강빈 부부의 개방'개혁'변화의지는 왕의 눈에 '변절'로 비쳤고, 궁궐의 권력암투에서 커다란 빌미로 작용했다.

인조는 귀국한 소현세자와 강빈을 의심했다. 청나라와 짜고 왕위를 찬탈할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인조 주변에 인의 장막을 친 인물들은 이 점을 십분 이용했다. 권력 투쟁의 저주와 음모, 독살과 살해가 잇따랐다.

소현세자 부부가 인조 23년(1645) 2월 9년 간의 인질 생활을 끝내고 귀국했을 당시 심양관(청나라 주재 조선 대사관격으로 소현세자와 강빈이 머물렀던 곳)에는 4천 700석의 곡식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강빈의 경영수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소현세자는 귀국 때 중국인 천주교 신자와 서양의 각종 과학기구'서적들을 들여왔다. 그러나 세자는 귀국 두 달 만에 부왕 인조에 의해 독살되었다.(물론 명확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강빈 또한 인조 24년 3월 친정으로 쫓겨났고, 당일 사약을 받고 죽었다.

역사 속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은 이전에도 있었다. 황진이, 장희빈…. 그러나 이들 기성 작품은 역사 속에서 면면히 살아온 인물이다. 소설 '강빈'은 360년 만에 살아난 한 여성 지도자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물론 소설 속에는 여성 지도자로서의 덕목뿐만 아니라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고, 남편과 깊은 사랑을 나눈 평범한 여성의 모습까지 나타난다. 조선시대 여성을 다른 소설에서 이만큼 부부의 침실에 대해 적극적이고, 음란하게 묘사한 글은 없었던 듯 하다.

강빈은 당대의 질서를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부덕한 여자' '나쁜 여자'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작가 박정애를 통해 강빈은 '국제인' '여성 CEO'로 거듭 태어났다. 조선사회에서 '지아비를 잘못된 길로 인도했던' 그녀는 오늘날 '남성과 여성이 꿈꾸는 이상적이고 능력 있는 파트너'로 거듭 태어난 것이다. 소설은 어머니 강빈과 어머니의 행장을 기록하는 딸 경녕군주의 이야기를 추리기법을 동원한 이중 구조로 풀고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이 소설을 통해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우한 여성과 궁궐의 음모와 저주, 허약한 조선사회의 이면을 두루 들여다볼 수 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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