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옥입니다] 겨울

입력 2007-01-10 07:47:08

결혼잔치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줄지어선 개나리 마른 덤불이 눈을 잡아끌었다. 가지 끝 점점이 묻은 노란 물감. 여차하면 꽃망울을 터뜨릴 태세다. 겨울 개나리가 드물지 않은 요즘이지만 그래도 볼 때마다 신기하다.

어디 개나리뿐인가. 가을의 傳令(전령) 코스모스도 여름부터 앞당겨 피더니 요즘은 그것도 멀다고 늦봄부터 성급하게 꽃을 피우기도 한다. 세상이 하도 바삐 돌아가서인가, 제철을 잊고 불쑥 꽃망울 내미는 녀석들이 정신없이 허둥대는 우리를 꼭 빼닮았다.

전 지구적 온난화 탓이다. 어저께 외신 사진엔 웃통을 벗어젖힌 뉴요커들이 브루클린 다리 위를 조깅하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센트럴 파크엔 때아닌 벚꽃이 피었다고도 한다. 춥고 눈 많은 뉴욕에서 이번 겨울엔 단 한 차례도 눈이 내리지 않아 129년 만에 '눈 없는 겨울'의 기록을 갈아치웠다는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이상으로 온난화가 심각하다. 極地(극지)의 만년설이 녹기 시작한 지는 오래됐고, 러시아에선 동면에 들어간 시베리아 곰이 따뜻한 날씨 탓에 금방 잠을 깨 어슬렁거리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알프스 산록의 스키장에서는 눈 대신 용담꽃이 만발했고,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선 때아닌 꽃가루가 날려 천식환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겨울이 사라져 가고 있다. 전 세계적 현상이다. 오재호 부경대 교수는 관련 연구보고서에서 늦어도 2100년에는 남한에서 사계절이 사라지고 봄·여름·가을만 계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막막해지고 슬퍼진다. 미련없이 잎을 떨구고 초연히 裸木(나목)으로 돌아간, 철학자 같은 겨울나무들과 '텅 빈 충만'의 경지를 말없이 보여주는 겨울산, 개똥지빠귀며 꺅도요 같은 겨울새, 그리고 하얀 보석 같은 눈송이…. 그런 겨울날의 풍경들을 깡그리 포기해야 하다니.

하기야 이미 겨울 날씨는 예전처럼 덥지도 춥지도 않아 밍밍해졌다. 톡 쏘는 맛이 사라져 싱거워 빠진 동치미 국물처럼. 겨울을 겪은 뒤라야 봄 땅은 더욱 빛날 터인데, 겨울이 없는 봄은 무의미하지 않으려나.

지난 주말, 대구에도 눈이 내렸다. 잠시 흩날리다 그쳐 사람을 감질나게 했지만 반가웠다. 언젠가 이 땅에서 사라질지도 모를 눈이기에 한 송이 한 송이가 안타까운 그리움의 무게로 와닿았다.

sirius@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