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쯤이더라? 분명 이 근처가 맞는 것 같은데…"
쏟아져 내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늙은 다람쥐가 다래덩굴 아래를 뒤적입니다. 쌓이는 눈을 헤치며 너럭바위 아래 언 땅을 파헤칩니다. 지난 가을에 갈무리해 둔 도토리를 찾고 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이 곳 저 곳 파헤쳐보지만 번번이 허탕만 칩니다.
"어이, 추워! 몇 군데나 묻어두었는데… 그것 참… 왜 이렇게 정신이 가물가물하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네. 그러나 저러나 산 너머 아들 손자네 식구는 이 겨울을 어떻게 나고 있는지…"
늙은 다람쥐는 눈 한 줌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녹여봅니다. 허기진 몸에 눈 녹은 물이 흘러들면서 새삼 한기가 몰려옵니다. 골짜기를 메워버리겠다는 듯이 하늘에서는 눈보라의 군단이 쉴 새 없이 달려듭니다.
달려드는 눈바람에 키 큰 나무들이 산비탈에 묻은 뿌리에 힘을 주며 안간힘을 쓰며 버팁니다.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찌지직 갈라지는 나뭇가지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들리지만 이내 그 소리조차도 눈 속에 파묻힙니다. 혼자 산비탈을 뒤지고 있는 늙은 다람쥐 등에도 눈은 계속 쌓입니다. 까만 눈만 내밀고, 사그락 사그락 눈 더미 속을 빠져나오려는 늙은 다람쥐의 필사적인 움직임을 쌓이는 눈이 점점 무겁게 짓누릅니다. 골짜기를 완전히 장악한 후에야 백색의 점령군들은 하늘 길 행군을 멈추었습니다. 날이 저물고 어둠과 함께 적막이 몰려왔습니다.
외롭고 길고 또 추운 숲 속의 겨울이 시작되었습니다. 얼어붙은 눈 속에 아랫도리를 묻은 채 나무들은 매서운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새파래진 입술로 휭휭 휘파람을 날립니다. 바위들도 눈 속에 묻힌 채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낮에는 해가 골짜기 입구를 잠깐 비추다 가고, 밤에는 별들이 눈밭에 쏟아지면서,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갔습니다. 사흘이 가고 나흘이 갔습니다.
봄이 되자, 서슬이 퍼렇던 백색의 점령군들도 대오를 흩트리며 퇴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빗쫑뱃쫑 산새들이 날아올라 새파랗게 봄 하늘을 열었습니다. 겨우내 허연 이빨을 꽉 물고 지내던 바위틈의 개울물이 시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응달의 나무들이 어깨의 눈을 털며 일어섰습니다. 온갖 나무와 풀들이 모두 깨어나 봄맞이에 분주합니다. 그런데 숲 속 어디에도 늙은 다람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늙은 다람쥐가 도토리를 묻어두었던 곳마다 상수리나무 떡잎이 파랗게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파랗게 눈을 뜨고 오들오들 떨며, 이 곳 저 곳 두리번거리고 있었습니다.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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