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플' 만사형통?)방학 맞아 서울로 원정수강까지…

입력 2007-01-09 07:46:01

올해 중학교 3학년이 되는 김모(15·수성구) 양은 요즘 어느 때보다 바쁜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다. 민족사관고 진학을 목표로 하는 탓에 내신성적 관리를 위해 오후 대부분의 시간을 학원수업에 매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다른 스트레스는 바로 '토플'. 지난해 9월부터 인터넷 토플(IBT)로 바뀌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김 양이 최근 받은 IBT점수는 112점. 기존 CBT로 환산하면 273점에 해당된다. IBT시험의 난이도를 감안하면 꽤 좋은 성적. 그러나 안심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김 양은 "다른 서류전형 요소가 많지만 쟁쟁한 지원자들이 몰리는 만큼 토플 성적의 근소한 차이가 당락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며 "학원에서는 113점(CBT 277점)이면 합격권에 들 수 있다고 하는데 솔직히 불안하다."고 했다.

▶불 밝히는 토플학원

지난 3일 오후 9시쯤 대구 수성구 H학원. 늦은 시간인데도 10여 개의 크고 작은 강의실마다 토플 수업이 한창이었다. 적게는 4~5명, 많아야 9~10명의 소수인원으로 편성된 각 교실에는 중·고교생 뿐 아니라 초등학생도 눈에 띄었다.

문제집을 펼쳐놓고 공부하는 교실이 있는가 하면 또래 학생, 강사 앞에서 영어로 발표를 하거나 컴퓨터 모니터를 클릭하며 단어 시험을 치는 학생들도 보였다. IBT로 바뀌면서 달라진 학원 풍경. 복도에 늘어선 칸막이 책상마다 학생들이 전날 숙제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 학원 원장은 "토플 학습자의 연령이 고교생 이하로 낮아지기 시작한 것은 2년 전쯤부터"라며 "서울에 비하면 한참 늦지만 대구의 불경기를 감안하면 많은 학생들이 토플공부에 뛰어들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쉬운 수능 영어' 탓에 가라앉았던 중·고교생 영어시장이 그나마 지탱하고 있는데는 청소년 중심의 새로운 토플시장이 형성되고 있는 점도 한 이유라고 했다. 그는 "이 중에는 토플시험은 치지 않고 수능·내신 영어를 위해 토플 교재로 공부하는 고교생도 많다."고 했다.

대구의 L학원은 이번 방학 동안 평일 하루 종일 전 강좌를 단기특강으로 채워 운영하고 있다. 이 곳 역시 수강생이 말하는 모습을 녹화해 대형 PDP화면으로 스스로 체크하게 하는 등의 첨단 수업법을 활용하고 있다. 학원측은 "초등학교 4학년생도 토플 수업을 받고 있다."며 "특히 특목고 인기가 높아지면서 중학생 수강생이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북적대는 곳은 학원뿐만이 아니다. 대구의 토플 시험장인 경북대 어학연구소. 40명이 시험을 칠 수 있는 이 곳은 올 3~4월까지의 응시 인원이 모두 다 찼다. IBT를 치러낼 수 있는 시험장이 전국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보니 시험스케줄(1년 29차례)이 발표되자마자 시험 기회를 얻기 위해 전쟁을 치러야 한다. 그 대열에서도 어린 응시자들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예식 어학연구소 소장(영어교육과 교수)은 "중·고교생 응시자가 매회 5~8명은 된다."면서 "답안을 써 내려가는 걸 보면 대학생보다 실력이 나은 학생도 많다."고 말했다.

▶토플준비는 서울에서?

"IBT로 바뀌면서 더 높은 강사 질이 요구되는데 솔직히 지방에서는 힘에 부칩니다." 수성구 H학원장은 최근 서울의 유명 토플전문학원에 업무차 들렀다 깜짝 놀랐다고 했다. 30여 명의 강사중 하버드, 예일 등 아이비리그 출신이 20명, 나머지도 UCLA 수준이었다는 것. 그는 "이런 강사를 고용하려면 기본 30평대 아파트에 연봉 1억 원은 줘야 한다."면서 격차를 실감했다고 털어놨다. 강사의 몸값이 강의 질과 반드시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험이 어려워지면서 강사의 학력이 점수와 비례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 방학때면 서울로 '토플 원정 수강'을 가는 학생들이 느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 대학 영어과 교수는 "실력 있는 외국인 강사를 물색하러 서울에 갔다가 몸값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과연 대구에 IBT를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강사가 얼마나 되겠나."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정확하게 듣고 읽으면서 동시에 논리적으로 쓰고 말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가르치려면 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거나 대학원 이상의 자격이 요구된다고 했다.

서울에서 스카웃돼 왔다는 한 토플 강사는 "(대구는)아직 서울에 비교가 안 된다. 서울·경기지역의 매년 외고 모집 인원이 4천여 명인데 평균 8대1의 경쟁률을 보이는 걸 감안하면 수도권과 지방의 열기 차이는 엄청나다."고 했다.

한 학원장은 "방학 두 달 동안 외국인 강사 3명을 포함해 강사 13명의 인건비만 1억5천만 원"이라며 "대구처럼 학원 수강료가 비현실적인 구조 속에서는 흑자 내기가 힘들다."고 했다.

대구시 교육청에 따르면 현재 대구의 외국어학원은 모두 345곳(입시 단과 제외). 이 중 토플을 가르치는 학원은 70~80곳이며 토플 전문학원이라고 할 만한 곳은 절반에 못 미치는 것으로 대구 외국어교육협의회측은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시장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구 학원들은 토플 시장이 점차 나아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지난 여름에 비해 수강생이 줄었다는 학원들도 비관적인 전망은 하지 않았다. 토플 수요가 점차 증가세를 보이는데다 서울 유명 학원의 분점들도 대구로 속속 진출하는 상황이기 때문. 토플 시장의 전체 파이가 커진다는 얘기다. 2주전 수성구에 개강한 서울 Y학원 가맹학원 측은 "일단 예상했던 만큼의 수강 인원은 채웠다."면서 "토플학원간의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질 것"이라고 했다.

▶토플열기, 왜?

"초·중학생은 조기유학과 특목고 진학, 고등학생은 수능·내신이나 대입 특기자 전형 대비용이라고 보면 됩니다."

청소년 토플시장의 주 수요층은 단연 특목고 준비생. 민사고, 외대부속외고, 한영외고, 대원외고, 청심국제고 진학이 주 타깃이다(대구외고, 경북외고는 특차 전형을 제외하고 토플 성적 제출을 의무화하지 않고 있다). 이들 학교 경우 CBT 220~260점을 요구하고 있다지만 합격선은 더 높게 형성돼 있다. 지난해 민사고 국제계열 합격생의 토플 평균은 280점(IBT 115점)이었다는 것이 학원가의 분석. 대구외고 경우 영어과 특차전형 토플 요구수준은 '공식적으로' 250점대였지만 실제 지원자들이 낸 점수는 270점대 안팎이었다.

서울 대치동 S어학원장은 "특목고 인기가 올라가면서 시험을 치려는 학생은 늘어났지만 토플이 더 어려워지면서 학원가로 더 몰리고 있다."며 "외고 진학 후에도 두각을 나타내려면 IBT 고득점 수준의 영어 실력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현행 IBT는 몇 배 어려워졌다. 독해 지문이 길어진데다 '말하기'가 추가됐고 '쓰기' 영역도 두 가지 형태로 CBT보다 심화됐다. 지문을 먼저 읽고 답을 유추하는 '요령'도 통하지 않고 시험 후기를 통해 떠도는 기출문제풀(Pool)도 아직 없다.

과거 PBT, CBT와 IBT 점수 비교표를 보면 더 확연히 드러난다. 과거 지필식 토플(PBT)시험에서 600점이면 고득점에 속했지만 이를 CBT로 환산하면 250점, IBT로는 100점 정도다. S학원장은 "CBT 성적이 270점 이상이라도 처음 IBT를 치면 100점이 안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했다.

수능, 내신 영어는 당연히 커버된다는 공감대도 토플을 '띄우는' 데 한 몫하고 있다. 독해, 쓰기, 듣기, 말하기 등 전 영역에 걸쳐 많은 공부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IBT 시험이 주창하는 '통합식 사고' 유형도 토플 대세론에 힘을 싣고 있다. 가령 독해 경우 과거에는 '주제문을 고르라'는 정도였지만 새 시험에서는 문장을 재구성하게 하거나 비교·요약하는 높은 수준의 독해력을 요구하고 있다.

각 대학에서 설치하고 있는 '영어우수자 전형' '글로벌 전형' 등도 토플의 메리트를 높이고 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자료에 따르면 2007학년도 대입 수시모집에서 성균관대가 영어특기자전형 250점(이하 CBT 기준) 이상, 중앙대 국제화분야전형 250점 이상, 경북대 영어능력우수자 전형 230점 이상 등을 지원자격으로 내세웠다. 톱클래스 대학은 아니더라도 대입에서 토플을 '무기'로 활용할 수 있는 대학은 많다는 것.

또 다른 흥미로운 분석도 있다. 성한동 대구외국어교육협의회장은 "1990년대 이후 조기영어 세대가 몇 년 사이 중·고교생으로 성장한 것도 최근 토플 붐의 주요한 원인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사회 전반적인 영어기초능력이 향상되면서 일찍 영어의 중요성에 눈을 뜬 이들이 영어실력을 차별화할 수 있는 '출구'로 토플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아 영어교육, 조기유학 등을 경험한 이들에게 영어는 사회 진출시 미래를 보장하는 '만능키'로 인식되는 셈이다.

▶토플은 만능일까?

"토플만으로 들어갈 수 있는 대학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있다 한들 학생들이 선호하는 상위권 대학은 극소수죠."

김성식 대구외고 교사(3학년 부장)는 시중 학원이 선전하는 만큼 토플이 위력을 갖는가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했다. 토플만으로 들어갈 수 있는 대학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 대교협 자료를 보면 영어우수자 전형 대학 가운데 상위권 대학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대구외고만 해도 48명 특차전형 합격자 가운데 토플 성적 우수자는 3명. 당초 모집인원인 7명에 절반도 안된다. 그는 "학원가의 얘기는 서울·경기 등의 외고에 국한되는데 이마저도 내신이라는 큰 변수가 있다."며 "너무 학원의 상술에 끌려가는 것이 아닌가, 일찍부터 학생들의 진을 빼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이예식 경북대 교수도 "당장 토플이 필요 없는 학생까지 토플에 뛰어들거나 '내 아이 실력 정도면' 하고 토플학원에 보내는 부모들의 욕심도 한 몫 하는 것 같다."며 "자신의 목표를 분명히 정하고 그 수단으로 토플이 정말 필요한가를 잘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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