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랑 한 장 남은 달력을 걷어내고 그 자리 새 달력을 걸려고 할 때, 머뭇거리지 않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렇게 머뭇거리는 짧은 순간에 지난 1년의 시간이 자석에 엉겨붙는 쇳가루처럼 확 달려들어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그동안 달력은 손때가 묻고 공기나 햇빛에 바래서 누렇게 변해 있다. 그렇게 후줄근하게 변하면서 달력도 역시 자신의 생을 견디어 온 것 같다. 묵은 달력을 떼내고 나니 가려져 있던 벽지 그 한 자리가 뽀얗다. 뽀얀 사각의 창 하나가 생긴 셈이다.
달력이 제 몸으로 한사코 바람과 햇빛을 막아냈던 흔적.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던, 바로 마지막 달력이 가리고 있던 성소 같은 그 뽀얀 사각의 자위는 마지막 장을 들어내는 사람의 쓸쓸한 노고를 위해 신이 보여주는 선물이 아닐까. 그 역시 경계의 미학 같은 공간이다.
사실 누구나 경계에 대한 매혹은 있다. 경계에 대한 매혹은 다분히 감성적이다. 새벽과 일몰의 정서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것이 경계의 미학을 지니기 때문이다. 안과 밖, 이쪽과 저쪽, 명과 암,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가는 해와 새해 사이, 이런 것들의 모든 경계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피치 못할 정서가 있다. 그 정서를 삶의 완충지대라 하면 또 어떨까.
종종 시를 쓰는 순간도 바로 그런 미세한 경계에 대한 포착으로 가능할 때가 많다. 존재하지만 부재하는 듯하고, 보이지 않는 듯이 보이는 그런 것, 새 달력을 걸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의 경계를 걸고 있다는 느낌이다. 가는 해와 새해를 구획하는 것이 다름 아닌 달력 한 장이라는 사실이 참 익숙하면서도 새롭다. 시간과 공간은 그렇게 맞물려 있다.
작년이나 올해가 그리 달라지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다시 새롭게 뭔가를 소망하는 것은 우리 모두 경계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똑같은 반복이라 하더라도 그런 경계의 삶이 있어서 미적지근한 일상에 새로운 기준 하나를 그으며 오늘보다 나아질 내일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경계에 부는 바람, 경계에 사는 삶은 아름답다. 그것은 아슬아슬한 사이의 미학과 금기의 유혹이 있기 때문이다. 한 주일과 한 달과 한 해의 비껴가는 듯한 마주침, 아름다운 그림이 있는 새 달력을 바꿔 걸면서 누렇게 바랜 달력, 꼭 무릎 튀어나온 내의처럼 동거의 흔적이 있어 쉬 버릴 수 없는 어제를 물끄러미 본다.
이규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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