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실무적인 말이 아니면 입 밖에 내는 일이 드문 순박한 농사꾼이셨다. 그런 분에게도 '평생에 가장 행복했던 때'라며 생각날 때마다 흔연해 하시던 어떤 시간이 있었다. 나라가 일제로부터 벗어나 光復(광복)하던 8'15 시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供出(공출)과 그로 인한 궁핍, 거듭되는 강제 徵用(징용)의 일제 말 전쟁시대를 20대 나이로 살아내야 했던 그 고난에서 벗어나게 됐다는 해방감이 컸으리라. "내 평생 딱 한 번 아무 묵은 맘 없이 한껏 웃었던 게 倭政(왜정) 망했을 때였더니라." 그 말씀 하실 때는 트레이드 마크였던 근엄함마저 사라지고 아이 같은 평화로움이 滿面(만면)했었다.
아버지는 이 아파트 광풍의 시대에도 평생 그런 집에 한 번 살아보지 못한 要領不得(요령부득)의 월급쟁이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평생에 가장 행복했던 때'라며 돌이켜 보길 즐기는 어떤 시간이 있다. 온 나라가 하나 돼 군사정권을 뒤엎던 1987년 6월의 民主抗爭(민주항쟁) 시기가 그것이다. 이념의 독점, 억압, 소통 단절, 패배감, 회색의 독재시대를 20대 나이로 살아내야 했던 고난을 끝낸 환희. 최루가스가 무릎 높이까지 쌓인 거리를 구름 위 누비듯 하면서도 온 백성이 하나 된 일체감에 스스로 감동해 몸 떨어야 했던 기억이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이리라. "그런 시절을 한 번만 더 살아봤으면 餘恨(여한)이 없겠다." 아버지 또한 생각이 그날에 미치면 더할 수 없는 그리움에 젖는다.
더 좋았던 것은 그 민주화 시기가 우리나라 經濟運(경제운)의 급상승 시기와도 잘 맞물렸다는 점이었다. 그때쯤 처음으로 "우리도 몇 년 내에 각자 자가용 승용차를 굴리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고, 그걸 '꿈 같은 소리'라고 웃어넘기던 많은 사람들도 그 불과 몇 년 후 실제로 운전면허를 땄던 것이다. 드디어 國運(국운)이 트이는구나! 대구도 덩달아 활기 方暢(방창), 사상 처음으로 '企劃發展(기획발전)'까지 시도했다. 문희갑 첫 민선 시장이 도시 구조개편 프로젝트를 구상했던 것이었다. 그 활기의 상징 같던 지하철도 그 정점에서 개통됐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민주항쟁을 통해 부풀어졌던 자신감과 활기는 10년 만에 생명을 다해버렸다. 1997년의 외환위기 사태가 결정적이었다. 그 사태는 비교적 빨리 극복됐다지만, 세상은 그보다 더 빨리 변해버렸고 상황은 결코 반전되지 않았다. '노숙자' '祖孫(조손)가정' '청년실업' 등등의 말을 누구나 입에 올리게 돼 버렸다. 듣도 보도 못하던 '양극화' 또한 당연시되기 이르렀다. 더욱이 대구는 한 번 빠진 잠에서 다시는 깨어나지도 못하고 있다.
그래도 아버지에겐 그 정도까지는 참아줄 수 있겠다 싶을 때가 있다. 갈수록 더 혼란스럽고 더 희한한 일들이 닥쳐드는 탓이다. 경제'사회 뿐 아니라 價値(가치) 기준과 사람들마저 변해버린 게 틀림없어 보일 지경에 이른 것이다. 힘들여 이뤘던 민주화가 공공연히 폄훼되는 반면 군사독재'인권유린은 되레 미화되는 상황이 온 듯이도 느껴진다. 舊勢力(구세력)은 드디어 욕심과 적개심을 당당히 까놓기 시작한 듯싶다. 온 나라가 편을 나눠 치고 받는 데 목숨을 건 듯이도 생각된다. 역사의 흐름이 뿌리부터 흐늘흐늘 갈지자걸음을 걷기 시작했음이리라.
벌써 50대 중반을 바라보게 된 아버지에겐 이제 아들이 걱정스럽다. 할아버지가 일제시대를, 아버지가 독재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그 20대에 아들은 이 비정상적인 혼란의 시대를 살아 내야 하는 탓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마음 속으로 혼자서나마 용을 쓰고 있는 중이다. "어느덧 2007년, 이제 갈지자걸음을 멈춰야 할 때가 됐다. 기회가 자꾸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민주화 20년 경제위기 10년. 마침 지역적으로는 새 지방정권이 실제적인 가동을 시작했고, 국가적으로는 새 대통령을 선출하는 해이다. 이보다 더 좋은 轉換(전환)의 기회가 또 언제 오겠는가. 더 이상 갈지자로 걸어서 정말 나라 엎어지는 꼴 나게 해서는 안 된다."
朴鍾奉 논설위원 paxkore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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