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패배와 실패도 생각하는 삶을

입력 2007-01-04 07:38:52

무엇이나 시작한다는 것은 아름답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새 달력, 새 다이어리, 새 스케줄표를 대하면 마음이 설레인다. 새해의 계획을 짜는 일이 이제는 낯간지러울 나이도 되었건만 그래도 변함없이 푸른 펜을 들어 조목조목 정리해 놓아야만 직성이 풀린다.

그런 심사는 우리들 평범한 장삼이사들만의 것은 아니어서 행새깨나 한다는 이들의 신년사가 이맘때면 각종 언론 매체를 화려하게 장식하곤 한다. 그들의 얘기대로라면 우리는 올 한 해 단군 이래의 태평성세를 누리게 될 모양이다.

조금은 허황된 꿈이라 해도 우리는 그저 덕담이려니 하고 웃어넘기곤 한다. 어차피 100% 달성되는 계획이란 없는 법이다. 그저 70% 정도 해낼 수 있으면 이상적이지 않은가 생각해왔는데 최근 어느 사람의 글을 보니 30%만 되어도 만족스런 삶이란 구절이 있었다.

계획과 실천, 꿈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란 이 정도로 멀고도 멀다. 적어놓고 나면 어색하고, 시간이 지나고 나면 쓴웃음이 나는 이유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나 그렇게 웃어넘길 수 없는 사람들의 말이 있다. 이른바 공인들이다. 특히 정치인들이다.

그들의 계획을 우리는 꿈이나 희망사항이라 부르지 않고 '공약'이라 부른다. 국민 모두와의 약속인 이 공약에는 70%나 30%가 있을 수 없다. 무조건 100% 달성해야만 하는 계획이다. '아니면 말고'가 통용되지 않는다. 부동산 거품을 빼겠다고 했으면 빼야 하고, 조령산맥을 뚫고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해서 대운하를 만들겠다고 했으면 뚫어야만 한다. 철도 페리를 운행하겠다고 했으면 그 첫 삽이라도 떠야만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들의 공약이 똑같지 않다는 데 있다. 누군가는 경쟁에서 탈락해야 하고 그의 약속은 없었던 일이 되고 만다. 대운하를 뚫자면 철도 페리의 공약은 허언이 되어버린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두 장본인이 모두 떨어지면 두 가지 공약 모두 탁상공론에 그치고 만다.

선택을 받고서도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 또한 비일비재하다. 국민과의 약속인 공약이 금주나 금연같은 개인의 희망사항만큼도 신뢰받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웃어넘길 수 없는 것이 그 공약의 불발이 두고두고 우리의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의 학습 효과로 우리는 그런 공약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선의 해인 올해 또한 수많은 장밋빛 약속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들에게 나는 제의하고 싶다. 신년사가 아닌 송년사를 써보라고. 경선이든 대선이든 당선 소감이 아닌 낙선 소감을 써보라고. 어떤 경쟁이든 승자와 패자는 가려지게 마련이다.

특히 선거는 단 한 사람만이 선택받는 무자비한 게임이다. 반드시 승자가 되어 살아남겠다는 결의는 현명하지 못한 생각일 수도 있고 지나친 독선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패배와 실패를 가정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경선에서 이겨 대통령후보가 된다면 이러이러하게 대선에 임하겠다고만 말하지 말고, 졌을 경우에는 이러저러한 길을 가겠다고 밝히는 것이다. 대선에서 이겼을 경우 어떠한 정책을 실행하겠다고만 하지 말고, 낙선을 해도 국민을 위해 무슨 일을 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올 한 해가 다 가고 나면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을까를 냉정하고 겸허하게 가정해서 그 소회를 정리해보는 것이다. 결코 패배주의의 나약한 정서가 아니다. 미리 자신의 유서를 적어보는 사람도 있다지 않는가? 진정한 강자만이 실패를 가정해볼 수 있는 법이다.

신년사가 아닌 송년사를 써보고, 당선 소감이 아닌 낙선 소감을 구상해보는 일은 결국 자신의 인생에 더는 물러날 수 없다는 마지노선을 치는 작업이다. 선거에서 떨어져도, 올 한 해의 야심찬 계획이 빗나가도 최소한 어떤 위치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 어떤 악인이라도 죽음에 임박해서 하는 말은 진정성을 가진다고 했다. 패배와 실패는 작은 죽음인 셈이다. 그 패배와 실패를 미리 가정해본다면 거침없이 내뱉는 화려한 약속 하나하나가 얼마나 구체성을 갖고 있는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으리라. 신년사가 아닌 송년사를 써보라. 성공만이 아니라 실패를 생각해보라.

고원정 소설가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