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와트에 다녀왔다. 허물어진 사원을 돌아 나오는데 맨발의 새까만 소년 하나가 달려온다. 노루새끼같이 재빠른 동작이 신기해 웃으며 쳐다봤더니 친구와 나의 새끼 손가락에 능숙한 동작으로 풀잎을 잡아맨다. 그리고 거기 자그만 꽃 한송이씩을 끼워준다.
관광객에게 꽃반지를 만들어주고 '원달러'를 요구하는 크고 검은 눈망울, 거기 담긴 기대와 애원과 비굴, 이건 도무지 낯선 풍경이 아니다. 최민식 선생의 사진에서 숱하게 구경하던 우리 모습이 곳곳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목격되는 곳이 캄보디아였다.
앙코르와트가 없었다면 나는 물론 캄보디아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캄보디아가 앙코르의 유적 뿐이라면, 노루새끼처럼 달려가는 아픈 크메르 소년의 눈빛이 아니라면, 제 아무리 앙코르 와트가 정교하고 장엄한 돌조각을 보자기처럼 뒤집어 쓰고 있다 해도 내 가슴이 이렇게 미어질 리가 없다.
그랬다. 빈곤이 남들에게 구경꺼리가 되는 모멸의 시절을 우리도 이제 막 빠져나왔다. 내가 저 아이들 만했던 60년대 배고파 손가락을 입에 물고 양지쪽에 서있던 풍경을 지금 그애들이 재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와 캄보디아는 식민지체험과 이념 분쟁과 내전과 찬란한 조상과 문화유산과 절대가난이라는 동병(同病)을 상련(相憐)할 수밖에 없는 나라다. 다만 우리는 그 절대 빈곤을 한 세대 먼저 졸업했고 그들은 지금 진행 중이라는 점만이 다르다.
문화유산의 측면에선 그들 앞에 우리가 당해낼 재간이 없을 듯했다. 그 앞에선 종족이 뭐든 GNP가 얼마든 일단 멈춰서서 신음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생명의 유한 안에 갇혀있는 자신의 알몸을 자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느 조상이 솜씨가 더좋고 나빴던지를 따질 필요야 없다. 지금은 앞서온 우리가 뒤따르는 그들 손을 잡아줄 필요만이 절실한데 그 '손잡음'은 이미 시엠립 벌판에서 탁월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시내와 앙코르와트의 중간 지점, 3만여 평의 부지위에 두 나라 합작으로 세운 20여동의 건물, 바로 앙코르-경주 문화유산 엑스포장이었다.
신라와 크메르 문명이 서로의 찬란을 각축하고 다채로운 문화 예술 공연들이 시공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곳, 그 중 관람객이 가장 많다는 3D 입체영상관에서 본 영화는 내용뿐 아니라 상영방식과 기술력과 파급효과까지가 두루 통쾌했다.
신라 화랑 기파랑과 앙코르를 건설한 자야바르만 7세를 스팩타클 화면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힘, 그 앞에 앉은 크메르의 후예들은 아예 넋이 나가 찬탄과 비탄을 동시에 흘린다. 천년 후에 자신의 후손들을 이런 방식으로 묶어주다니 역시 영웅은 죽어서도 영웅임에 틀림없다.
툭툭이를 타고 나간 씨엠리업의 밤거리는 활기에 넘쳤다. 비록 목구멍이 아플만큼 먼지를 들이마셔야 했지만 자본과 인력이 정신없이 유입되고 있는 게 분명했고 다국적 관광객들로 노천카페는 발디딜 틈이 없었다. 그 중심축에 한국이, 중앙정부가 아니라 지자체가 있었다. 내 눈엔 이 잔치가 세계를 향해 뻗어나갈 매력적인, 고부가 문화 외교사업의 교두보가 될 게 확실해보였다.
지금 우린 크메르 소년이 간절하게 외치는 '원달러'정도야 고민없이 집어줄 정도로 부자가 됐다. 흐뭇한 일이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원달러'를 물 쓰듯 쓴다해서 그들의 빈곤을 조롱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건 아닐 게다. 우린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 전에 우리가 당했던 꼴사나운 제국주의를 반복해선 안된다.
그들의 손을 잡되 이성보다 감성이 우세한 크메르인의 속깊은 자존심을 지켜주면서 함께 가야한다. 그것이 일찍이 강대국들에게 수모를 경험한, 아직도 옛 울분이 채 사그러지지 않은, '아픈 만큼 성숙해진' 오늘 한국인 앞에 놓인 숙제다.
문명과 국부(國富)란 돌고 돌고 또 도는 것임을 캄보디아만큼 실랄하게 보여주는 곳이 또 어디 있을까. 도처에 교훈이다! 새해가 밝아온다. 복많이 받으라고들 인사하지만, 복의 정체가 과연 뭘까. 언젠가 베풀었던 덕이 내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 복이라면, 그건 국가와 개인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김서령(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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