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어느 겨울. 술집에서 노래를 팔고 웃음을 팔았던 김금옥(53·당시 27세) 씨는 이유없이 몸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병원을 가 봐도 아픈곳이 없다는데 통증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당시 술집이 있었던 대구 남산동 근처에 즐비했던 점집을 찾아갔다. 점쟁이가 내 놓은 답은 '신기(神氣)'때문이라는 것.
그 점쟁이는 '부지런히 기도하고 복을 짓고 사는 것만이 방법'이라고 했다. 기가 막혔지만 딱히 다른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보현사 입구 서점에서 불교 경전을 하나 샀다. 그 속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육바라밀 중에서 '보시'를 행하라는 말씀이 눈에 쏙 들어와 박혔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내가 남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그날부터 그녀는 뜨게질을 시작했고 15년을 꼬박 손에서 털실을 놓지 않았다.
그녀가 짠 털스웨터는 동네 홀몸 노인들에게, 영천 시립희망원의 고아들에게 전달됐다. 술 파는데 지장을 준다고 업소 주인에게 쫒겨나기까지 하면서도 그녀는 털실 보따리와 대바늘을 놓지 않았다. 쉬지 않고 뜨게질을 하다보면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슬픔이 잦아들고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의 김 씨는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마야의 집 가정봉사지원센터'에서 기초생활수급노인들을 보살피는 일로 정신없이 바쁘다. 5년간 '룸비니 동산'에서 지체장애아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다, 지난 2004년부터는 자신의 뜻을 펼쳐 노인 복지사업에 헌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야 몇 방울의 눈물만으로 담담하게 털어놓지만 그녀의 인생역정은 '파란만장'이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모자랄 정도다. 13살에 부모님을 여의고 껌팔이, 구두닦이 등 안해본 일 없이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다 돈에 팔려 발을 들여놓게 된 술집. 우연히 불교 경전을 보고 시작하게 된 뜨게질 보시. 이제 사람구실 좀 하고 사나 싶었을 때 난데없이 찾아든 암 선고. 대구 시민들의 성금으로 단 1%라는 생존율을 뚫어낸 생명의 기적. 또 다시 찾아든 자궁암. 그 수많은 고비를 넘기고 시작하게 된 봉사하는 삶….
'어유, 어떻게 사셨어요?'라며 고개를 절래절래 젓는 기자에게 김 씨는 "그래도 주위에 좋은 사람들만 가득해 살만했다."며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중 단 한사람만을 꼽아보라고 했더니 '생명의 은인'이라며 경북 도청 공무원이었던 엄지호씨를 꼽았다.
"그 분이 없었으면 이미 죽은 목숨이지요. 한낱 술집 여자에 불과했던 나에게 병과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성금을 모아주고, 그 이후에도 잊지않고 여동생처럼 챙겨주셨던 그 분 덕분에 제가 이렇게 남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를 돌려줄 기회나마 가질 수 있는것 같습니다."
유난히 거칠고 힘들었던 인생길이었지만 잔잔하게 추억할 수 있는 기쁨의 순간들도 많다. 그 중 김 씨가 꼽는 가장 기뻤던 순간은 남산동 동민상을 받던날. 뜨게질이라는 특별한(?) 선행이 알려지면서 도지사상에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지만 가장 자랑하고픈 상이 남산동 동민상이란다.
"처음으로 남을 돕겠다는 마음을 먹고 남산동 좁은 쪽방에 기거하고 있는 노인들을 찾았습니다. 한달에 세 집씩 쌀을 팔아드리고 연탄 몇 장과 뜨게질한 스웨터를 놓아놓고 왔었지요. 그 사실이 어르신들 입소문을 타고 알려지면서 그 해 연말에 동사무소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 가장 가슴 따뜻하고, 저 자신에게 뿌듯함을 느끼도록 만들어줬던 상입니다."
이제는 잦은 병치레로 몸이 망가져 약 없이는 살수가 없고 일주일에 한 번 씩은 병원을 찾아 링거를 꽂아야 하지만 김 씨는 '지금이 더 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고 했다. 고아원을 운영하는 것이 꿈이었던 그녀는 시대의 변화에 맞춰 노인요양원 운영으로 목표를 수정했고, 이제 곧 완성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가장 큰 난제였던 동네주민들의 민원문제가 해결되고 내년이면 착공에 들어간다.
"술집 한 구석에서 뜨게질로 세월을 보내고 병마와 싸우며 죽을날만 기다렸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 행복하지요. 앞으로 더 살다보면 좀 더 행복한 날이 있을까 모르겠지만 저는 올 연말이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사랑으로 얻게된 여분의 삶, 외롭고 힘든 노인들을 돌보면서 남은 여생을 함께 늙어가고 싶다는 김금옥씨의 소망이 새해에도 계속해서 빛을 발할 수 있기를 빌어본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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