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무료급식소 '관음의 집' 이정숙 대표

입력 2006-12-28 16:31:47

지금부터 꼭 36년 전인 1970년 겨울, 유난히 자그마한 체구의 18살 여고생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먹고 살기 힘든 시절. 불교학생회에 몸 담고 있던 이 여고생은 동지(冬至)날 스님을 따라 대구역 앞으로 갔다. 손에는 친구들과 직접 쑨 팥죽 양동이가 들려져 있었다. '작은 설'로도 불리는 동지날, 굶고 지낼 노숙자들에게 무료 급식을 하기 위해서. 팥죽을 나줘주기 시작하자마자 역 앞에서 추위에 오들오들 떨던 노숙자들의 긴 행렬이 이어졌다. 허겁지겁 한 그릇을 비우고는 행여 팥죽이 동 날새라 줄 뒤로 다시 달음질치는 노숙자들을 보며 여학생은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여학생은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미안합니다. 팥죽 한 그릇도 넉넉하게 대접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제가 크면 따뜻하게 지은 하얀 쌀밥을 배불리 드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약속합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지난 1990년. 세 아이의 엄마가 된 그 여학생은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자녀들이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할 수 있게 되자 어려운 이웃을 찾아 나섰다. 그 주인공은 대구시 서구 평리동 대구종합가정복지관 지하에서 노인들을 위한 무료급식소인 '관음의 집'을 운영하는 이정숙(54) 대표. 기자가 찾아간 지난 21일, 그날도 그는 팥죽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침 내일이 동지예요. 자원봉사자, 이웃 노인들이 힘을 모아 내일 대접할 팥죽 300인분을 준비했습니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뿌듯하답니다."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시냐?"는 기자의 어리석은 물음에 그는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답했다. "그렇게 살겠다고 결심했으니까요." 지난 세월을 떠올리자 주름 속에 잦아든 그의 눈이 촉촉히 젖어왔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급성맹장염으로 수술을 받게 됐단다. 하지만 수술이 끝난 뒤에도 전신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사그러지는가싶던 그의 생명이 다시 깨어난 것은 수술 후 2시간이 훨씬 지난 뒤. 자신의 생명은 건졌지만 아이 걱정이 밀려왔다. 틀림없이 장애를 안고 태어날 것으로 예상했던 큰 딸은 다행히 아무런 탈이 없었다. 그는 다시 한번 결심했다. 새로 받은 이 생명, 이웃을 위해 쓰겠다고. 유난히 총명했던 큰 딸은 카이스트(KAIST)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동료 박사와 지난해 결혼했고, 지금도 계속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관음의 집'을 시작하기 전 그는 교도소를 찾아가 사형수, 무기수들과 상담하고 편지를 주고받는 봉사를 했다. 그 때 알게 된 한 사형수 이야기.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그는 농사일을 못견디겠다며 젖먹이를 떼어놓고 집을 나가버린 아내 때문에 인생이 바뀌게 됐다. 젖먹이를 들쳐업고 찾아간 처가에서 그는 문전박대를 받았다. 아기가 젖을 뗄 때까지만 키워달라는 그의 당부도 아랑곳않고 아기를 뙤약볕 아래 내동댕이쳤단다. 이성을 잃고만 그는 얼마 뒤 처가를 찾아가 처조카 두 명의 생명을 앗아버렸다. 이정숙씨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그 사형수는 이렇게 썼다. "제가 처가집 개로 태어나서라도 그 죄를 씻고 싶습니다." 자신의 죄를 감당하지 못했던 그 사형수는 이미 생명을 포기한 상태. 지난 1994년 결국 그의 형이 집행됐고, 이씨는 그 때부터 교도소 봉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관음의 집'이 문을 연 것은 지난 1996년 12월. 올해로 만 10년이 됐다. 앞서 중구 약전골목에 있던 '자비의 집' 무료급식소에서 일한 경험을 토대로 학창시절 함께 봉사활동했던 친구들과 함께 무료급식을 시작했다. 시작할 당시 대구시 지원금은 연간 600만 원. 하지만 이 중 490만 원은 임대료로 다시 대구시에 돌려줘야 했다. 지금도 운영비 대부분은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꾸려지고 있다. 하지만 현금 후원은 월 20만 원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점심 마련에 필요한 식재료로 직접 받고 있다. "가끔 월말이나 연말에 정산하고 나면 남는 돈이 조금 있습니다. 행여 탈이 날까 싶어서 효도관광이나 경로잔치를 통해 항상 모인 돈을 소진합니다."

이곳을 찾는 노인은 하루 평균 200여명. 지금까지 점심 한 끼를 해결한 연 인원만 48만8천여명을 헤아린다. 급식소 벽 한 켠에는 얼마 전 효도관광을 가서 찍은 커다란 단체사진이 걸려있다.

"저기 사진 속에 계신 분들 중에 이미 여러 분이 더 이상 이곳에 못 나오신답니다. 매일 나오던 분이 갑자기 며칠 안보이면 결국 돌아가셨구나하고 생각하죠. 가끔 자녀들이 고맙다며 찾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지금껏 살아온 인생에서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이었냐고. 잠시 생각하던 그는 이렇게 답했다. "바로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이죠. 남을 도우며 살 수 있는 지금의 삶, 그 자체가 제게는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이랍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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