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 '딸은 좋다'

입력 2006-12-26 08:16:29

'딸은 좋다.

딸 옷은 예쁜 것이 많기 때문에

예쁜 옷을 입힐 수 있다.

바지도 입힐 수 있고

치마도 입힐 수 있다.

치마를 입히면 긴 양말을 신기고 구두를 신길 수 있다.

머리는 두 갈래로 묶을 수도 있고 묶은 머리를 길게 땋을 수도 있다.('딸은 좋다' 中)'

한때 '○○는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에 여러가지 말을 대입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제법 철학자 흉내를 내던 때였다. 10자밖에 안 되는 이 문장이 가진 위력은 무엇일까. 너무나 잘 알고 있던 것, 하지만 바쁜 일상을 핑계로 잊고 지내던 것들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보도록 하는 데 있지 않을까. 훌륭한 책도 그런 것이다.

서점에서 어린이 도서를 뒤지다 '딸은 좋다'(채인선 작/한울림어린이 펴냄)를 골라 들었을 때 예쁘게 만든 그림책 정도로만 생각했다. 수채화풍으로 그린 3, 4살 예쁜 여자아이의 웃음도 끌렸다. 책 소개에도 7세~초등 저학년용이라고 돼 있었다. 그저 그런 내용이겠거니 하고 한 장 두 장 책장을 넘기면서 처음에 잔잔하던 미소가 왈칵하는 감정으로 번져나갔다. 기분좋게 뒷 머리를 얻어맞은 듯 행복했다.

이 책은 딸 예찬론이다. 딸이 좋은 이유가 40쪽에 걸쳐 펼쳐진다. 딸이 태어나서 응석을 부리고, 말을 잘 듣지 않기도 하고, 아빠를 마중나가고, 한 남자를 만나 시집을 가고, 다시 엄마가 되기까지 저자가 늘어놓는 딸 자랑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사실 부모 자식만큼 평생 살을 부대끼고 살면서도 모르는 관계가 또 어디 있을까. 징글맞게 말 안 듣는 아이가 밉기도 하고 잔소리만 해대는 엄마가 그렇게 미울 수 없다. 열 달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 맞을까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이니.

책 '딸은 좋다'가 좋은 또 하나의 이유라면 간결성에 있다. 이 책이 어린이용으로 분류되는 이유일 것도 같다. 문장은 대체로 열 줄을 넘지 않는다. 알록달록한 수식어도 없다.

'딸은 아버지를 어떻게 즐겁게 하는지 알고 있다.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나무에 올라가 서고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딸은 좋다.

사진 찍는 아버지에게 좋다.'

동시처럼 운을 맞춘 것도 아닌데 가슴에 팍 하고 꽂히는 이유는 이 책이 주는 공감의 힘에 있다. 이 책 속에 나오는 삽화들(개구쟁이 딸의 웃는 모습, 엄마 옆에 누워 오이 마사지하는 모습, 머리를 빗는 모습, 자전거를 타는 모습)은 부모라면 누구나 한 장씩 가지고 있을 법한 사진들이다. 저자는 평범한 것에서 진한 감동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알고 있는 듯하다. 아무것도 아닌 것,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감동을 이끌어내는 것은 모든 문학의 지향점이 아닌가.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서평도 있지만 연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 아이가 이 책이 주는 메시지를 얼마나 이해할까 걱정할 필요는 잠시 접어둬도 좋을 것 같다. 그냥 아이와 함께 팔베개를 하고 누워 읽어봐도 좋을 듯하다. 단 주의할 것이 있다면 딸 없는 이들은 몹시 배가 아플 것 같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가치사전'을 쓴 채인선 작품이다.

최병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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