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은 아쉬움이 많은 달이고 생각이 많은 달이다. 인디언들은 12월을 '무소유의 달', '나뭇가지 뚝뚝 부러지는 달', '다른 세상의 달' 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달(月)을 명명하는 것만 보아도 자연에 순응하는 법을 터득하고 나무를 보며 마음 비우는 법을 깨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텅 빈 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좋아 무작정 걷다가 나뭇잎 다 져버린 겨울 숲에 들었다. 언덕을 타박타박 걷다 보니 많은 골짜기 중에 한 곳이 환하다. 그 곳에 전구라도 밝혀놓은 듯했다. 저 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았다. 앙상하고 키 큰 나무가 마른 가지를 하늘 깊숙이 찔러 넣고 있었다. 그 나무가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오래 전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 때 금빛 가루를 카드에 칠했던 것처럼 그랬다.
나무는 제가 받은 빛을 반사해 주변의 나무들까지 황금빛으로 찰랑거리게 했다. 그 오묘한 빛잔치를 무어라 말로 표현 할 수가 없다. 나는 가던 길도 잊고 나무 한 그루가 겨울 숲을 고요히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벅차 한동안 가만히 서있었다. 나무가 초록 잎을 무성히 매달고 있으면 햇빛을 받아도 저런 빛이 품어 나오지 않는다. 잎이 다 떨어졌기에 가능한 것이다. 언젠가 신록의 잎에서 차가운 은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다. 계절에 따른 빛의 조화가 참으로 경이롭다.
잘생기지도 않은 갈참나무 한 그루가 숲을 금빛으로 술렁이게 했다. 바라보는 나도 금빛으로 물드는 기분이었다. 저 나무가 신의 은총을 받은 것 같았고, 신의 은총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는 남보다 먼저 더 많이 은총 받기를 원한다. 받은 것을 두고도 내 것과 남의 것을 비교하고 무게와 크기를 재보려고 안달이다. 그러나 저 나무는 제가 받은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있지 않은가.
얼마 전 어느 교수님의 정년퇴임기념 음악회가 있었다. 뒤풀이 자리에서 그분의 인사말이 인상 깊었다. "그 동안 두 주먹을 꼭 움켜쥐고 분주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와 주먹 쥔 손을 펼쳐보니 아무 것도 없고 땀에 젖은 손금 밖에는 없었습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내 것이 아니고 잠시 내게 왔다 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한 평생이 걸렸습니다."고 하셨다. 모두들 박수를 치면서 와-하고 웃었지만, 숙연해지는 한 마디였다
이 말은 외부세계를 바라봄과 동시에 내면을 응시하는 눈을 잃지 않는데서 나온다. 마음을 응시하려면 조용한 시간이 필요하다. 겨울나무가 모든 것을 털어내고 조용히 휴식을 취하듯이 말이다. 짧은 순간에 본 숲의 빛잔치는 신의 은총 같아서 오래도록 여운이 남을 것 같다. 나는 은총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받은 것을 즐거이 나누어주는 마음 자세가 은총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주위를 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그동안 나도 앞만 보고 사느라 주변을 살펴보지 못했다.
올 겨울은 예년보다 더 춥게 느껴진다. 마음이 추워 움츠러들었나보다. 어느 시인의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시가 떠오른다. "누구에게 연탄 한 장의 온기를 나누어 준적이 있었던가?" 하고 나에게 묻는다. 삶이란 다른 이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어 보는 것 아니던가. 이 겨울 이웃에게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어야겠다.
12월은 다 비우고 침묵하고 있는 나무에게서 감사와 사랑을 배우는 달이다. 나무는 다 비워야 엄동설한의 '얼음 반짝이는 달(1월)'을 견뎌낸다. 그래야만 또 '삼나무에 꽃바람 부는 달(2월)',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달(3월)', '생에 기쁨을 느끼게 하는 달(4월)'을 즐거이 맞을 수 있다. 생의 기쁨은 같이 나누는데 있다. 혼자 느끼는 기쁨은 온전한 기쁨이 될 수 없지 않은가.
박지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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