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용의 현장리포트] 음모론으로 본 2006년

입력 2006-12-21 14:14:25

음모론(陰謀論)은 매력적이다. 누가 책임질 필요도 없고, 실체가 없으면 그 뿐이다. 올해도 여지없이 매력적인 음모론들이 득세했다. 정치판이 음모론으로 얼룩졌고, 경제계는 유난스레 음모론에 시달렸다. 행여 음모론을 계획적으로 생산해내는 비밀 국가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 모든 것들이 대한민국을 혼란스럽게 만드려는 특정 국가의 조직적 음모는 아닐까?

◇ 황우석 죽이기

작년말부터 올초까지 대한민국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던 대표적인 음모론은 바로 '황우석 죽이기'. 황빠(황우석 지지자)와 황까(황우석 반대자)라는 신조어까지 만들면서 일대 혼란을 불러왔다. '황우석 음모론'의 핵심은 그의 몰락을 노린 거대한 배후세력이 있다는 것. 줄기세포를 둘러싼 관련 학계와 업체들의 이권 다툼, 미래 핵심산업에서 한국의 주도권을 막으려는 미국와 영국의 개입, 인간 복제를 결단코 막으려는 종교계의 간여까지. 모방송사는 음모론의 실체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당초 황 교수와 손을 잡았던 미국의 새튼 교수가 황 교수의 원천기술인 쥐어짜기(스퀴징) 기술을 이용한 핵 이식 및 배반포 형성 과정을 미국 정부에 특허 출원했고, 세계 180여개국에서 특허가 승인된다면 황 교수의 원천 기술 로열티를 모두 새튼 교수와 미국 정부가 독식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논란은 검찰 및 서울대진상조사위 발표 이후 숙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지지자들 사이에서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

◇ 제이유 사기사건

일부에서 '단군이래 최대 사기사건'으로 표현하는 제이유그룹 사건도 음모론에서 출발했다. 당초 제이유 사건은 한 인터넷 매체가 국가정보원 문건에 근거해 '제이유그룹이 2001년부터 검찰과 경찰, 법원의 간부들에게 직급'직위별로 수백만 원에서 많게는 수천만 원, 1억 원까지 로비했고, 다단계업계를 관리하는 공정위 관계자들도 돈으로 매수했다.'는 내용을 인용 보도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제이유측은 '경쟁관계에 있는 모 회사가 국정원과 연결돼 제이유에 타격을 주기 위해 허위로 작성한 문건'이라며 음모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후 문건에 올랐던 유력 인사들이 줄줄이 구속되거나 조사대상에 오르면서 음모론의 기세는 한 풀 꺾이고 말았다.

◇ 론스타를 둘러싼 음모론

외환은행의 헐값 매각과 론스타코리아의 탈세 혐의로 불거진 이른바 '론스타 사건'도 음모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검찰 수사가 한창이던 지난 11월 1일 존 그레이켄 론스타 회장은 성명을 통해 "지난 1년간 강도높은 조사에서 별다른 혐의를 잡지 못한 한국 검사들이 확실한 증거도 없이 막연한 음모론에 근거해 새로운 공격을 시도한다."고 말했다. 론스타 사건은 검찰 수사만 끝났을 뿐 법정 공방이 남아있어서 아직 음모론의 성립 여부를 말하기 어려운 상태. 다만 외환은행 헐값 매각을 둘러싼 고위층 로비 의혹을 규명하지 못한 반쪽 수사라는 오명을 씻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아울러 이번 사건은 최악의 법원-검찰 갈등을 빚으며 사상 초유의 '대법원장 배후 음모론'까지 등장했다. 론스타 관련자 구속영장을 둘러싼 양측 갈등은 이용훈 대법원장의 변호사 시절 외환은행 소송 대리를 둘러싼 음모론으로 비화했다. 쉽게 말해 대법원장이 변호사 시절 외환은행 사건을 맡았던 만큼 더 이상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검찰이 청구하는 론스타 관련자 구속영장을 기각하는게 아니냐는 것. '소송을 맡았다'와 '영장을 기각했다'는 별개의 사안을 억지로 끼워맞춘 이 음모론은 이후 정보 유출자로 검찰을 지목하는 음모론과 변호사 업계를 의심하는 음모론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 정치판 음모론

5'31 지방선거를 앞둔 지난 4월 21일 조재환 민주당 사무총장이 전북 김제시장 예비후보인 최락도 전 의원에게 공천헌금 4억 원을 받은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민주당 유종필 대변인은 "잘 짜여진 시나리오이자 민주당에 대한 외압 말살정책"이라며 음모론을 제기했다. 앞서 유 대변인은 음모론에 대해 명언을 남긴 바 있다. 지난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이인제 후보의 음모론에 대해 "음모론적 시각에서 보면 해가 뜨는 것도 음모고, 지는 것도 음모며, 세상만물이 모두 음모로 보인다."고 말했다.

5월초에는 '박계동 동영상' 파문이 있었다. 한나라당 박계동 의원이 서울 청담동 한 고급 룸카페에서 여종업원의 상의를 젖혀 가슴을 만지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된 것. 포털사이트에는 '박계동'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박 의원측은 "지난 3월에 촬영된 몰카 동영상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특정 부분만 떼어내 유포된 것은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했다.

이밖에도 정치판 음모론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잘 모르는 일(자신에게 해가 되는)이 벌어졌을 때 또는 벌어지려할 때는 여지없이 '음모'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지난달 공성진 한나라당 의원은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압도적으로 한나라당이 지지를 받는 것을 경계해 저쪽(열린우리당)에서 2002년 대선 당시 '김대업 공작'과 같은 X파일을 만들고 있다고 들었다."고 주장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정치행보를 재개한 것을 부정적으로 몰고가 한나라당에 부패·수구의 이미지를 덮어씌우려는 네거티브 선거전략을 기획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제기한 것이다. 또 민주당 정균환 부대표는 자신에 대한 전북도당의 당원제명 통보에 대해, 정계 개편에 대해 의견을 달리했던 자신을 제거하려는 한화갑 대표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이달 초에는 열린우리당내에 나돌았던 '김근태 의장 사퇴설'에 대해 김한길 원내대표가 의도적으로 흘렸다는 음모론이 제기돼 지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 대통령 관련 음모론

지난달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비공개 발언 유출을 둘러싸고 '음모론'이 난무했다. 발언의 취지는 "임기 후에도 정치, 언론 운동을 계속하겠다."는 것. 이에 대해 한나라당측은 "노사모가 노 대통령의 발언록을 유출한 것은 이심전심으로 이뤄진 일이다. 대통령의 의중을 알리기 위해 청와대가 기획조종하고 노사모가 실행에 옮긴 것"이라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노사모 내부도 음모론으로 들끓었다. 녹취는 노사모가 했지만 이를 공개한 것은 다른 친노 조직인 '국민참여 1219'이며, 노사모에 타격을 주기 위해 일부러 노사모 김병천 대표의 녹음 사실을 공개했다는 것. 일단 음모론의 존재 유무를 떠나 노 대통령의 의중은 확실히 외부에 공개됐다.

한미 FTA 관련 음모론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최근 사직한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특보가 FTA에 대해 강력한 반대 입장을 밝힌데 대해 일각에선 "노 대통령이 FTA를 추진하는 것처럼 협상을 진행하다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자주노선을 앞세워 판을 깨고 지지세력 재결집을 도모할 것"이라는 음모론을 내놓았다. 과연 음모론으로만 끝날 지는 내년 협상을 지켜봐야 알 수 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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