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신화에 '거미가 된 여자' 이야기가 나온다. 종종 인간들이 신에게 대항하고 신을 무시하게 되는데 아라크네(Arachne)도 그런 부류였다. 베 짜기 솜씨가 뛰어난 아라크네는 평소 자기 자랑이 심했다. 소문을 들은 직물의 여신 아테나가 그녀를 찾아와 시합을 갖자고 했다. 듣던 대로 아라크네의 솜씨는 뛰어났다. 그런데 여신의 면전에서 아라크네는 자기 기술이 우월하다고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화가 난 여신은 그녀가 짠 천을 찢고 매질했다. 두려움과 슬픔에 못 이긴 아라크네가 자살을 기도하자 여신은 허락하지 않고 거미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신화는 신들을 노하게 한 인간의 죄 중 가장 나쁜 것이 驕慢(교만)임을 가르치고 있다.
최근 일본 집권 자민당의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정조회장이 한 강연에서 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이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것은 '범죄'라고 발언했다. 그는 "원폭을 투하한 미국의 판단은 인도적으로도 정말 허락할 수 없다"며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는 아베 총리와 이념적으로 가장 가까운 '매파' 정치인으로 종군위안부를 부정하는 등 일본이 저지른 과거사에 대해 왜곡된 발언을 계속해온 인물. 일본의 핵무장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한 그는 일제의 침략으로 아시아 국가들이 당한 엄청난 고통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그의 망언에서 알 수 있듯 아베 정권이 내건 '아름다운 나라, 일본'은 그럴듯한 포장일 뿐 교만하고 厚顔無恥(후안무치)한 일본만이 보일 뿐이다.
이 같은 일본의 과거사 망각에 대해 세계가 걱정하고 있다. 헬무트 슈미트 전 서독 총리는 얼마 전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과 중국이 일본을 불신하는 근원이 반세기 이전 일본의 행동에 있음을 모르는 일본인도 있다"고 쓴소리를 했다. 종군위안부 관련 결의안을 통과시킨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는 지난 9월 이례적으로 일본 과거사 청문회를 열어 과거사 문제 해결에 미온적인 일본에 대해 압박하고 있다. 부시 전 미국 대통령도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 전례 없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쇠 귀에 경 읽기'다. 일본은 지난 12월 15일을 전후 일본사에서 특별한 날로 만들어버렸다. 종전 후 50여 년간 '평화국가' 일본의 상징이었던 교육기본법과 방위청설치법에 손을 댄 것이다. 오래전부터 이 법들을 고치기 위해 血眼(혈안)이었던 일본의 보수세력은 개인보다 공익을 중시하고, 교육에 대한 국가의 관여를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침략전쟁을 주도한 군부의 독주를 반성하는 뜻을 담아 1954년 만든 방위청설치법도 개정, 자위대의 해외 활동을 한층 강화하도록 했다. 국제사회의 기대를 저버리고 '누가 뭐라고 해도 하고 싶으면 한다'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일본을 보면서 한국과 중국 등 이웃 국가들의 신뢰는 더욱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나 격정과 당파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하며 경험이 비춰 주는 빛은 船尾(선미)에 달린 등불이어서 우리가 뒤에 남기는 물결밖에 비추지 못한다"는 영국 시인이자 철학자 사무엘 콜리지의 말이 틀리지 않다.
2006년 丙戌年(병술년)도 이제 열흘밖에 남지 않았다. 이맘때면 누구나 겸허한 마음으로 지난해를 되돌아보게 된다. 1년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았는가를 생각해보지만 저마다 좌표가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걸어온 길이 끝없이 계속되는 내분과 외압의 급한 혼돈과 狂氣(광기)의 역사를 쓴 것은 아닌지, 이념과 권력'물질 등을 움켜쥐기 위해 인간성에 온갖 생채기를 내지는 않았는지,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는 美名(미명) 아래 온갖 협잡과 비굴한 타협, 맹목의 한풀이의 시간이 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깊은 성찰만이 희미한 물결 속에서 우리가 걸어온 길을 반추해내고 진정한 역사의 가르침을 돋을새김해내기 때문이다. 密雲不雨(밀운불우)의 답답하고 고달픈 한 해를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丁亥年(정해년)은 뭔가 달라질까.
서종철 논설위원 kyo42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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