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 어긋나는 신사참배 할 수 없다"고 4번 투옥, 초주검으로
"죽어서는 주기철, 살아서는 이원영"
신앙의 모범을 보인, 예수님의 참 제자
세속주의와 물질만능이 판을 치는 오늘날 복음은 여기저기서 먹기 좋은 모양으로 만들어지고 울긋불긋한 색깔이 입혀진 채 선포되고 있다. 교회 덩치는 커지고, 첨탑은 높아져만 가는데 세상을 살리는 생명력은 떨어지고 있다. 늘어나는 교인수에 비례해서, 존경받는 교회가 그만큼 많지 않은 것이다. 자칫하면 전세계를 놀라게 할 정도로 큰 부흥을 가져온 20세기 하나님의 등불이 한국에서 다른 데로 옮겨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이 교회 안팎에 퍼져 있다. 복음을 통한 사회 변혁과 갱신 요구가 높아지는 이유이다. 누굴 모범으로 삼아서 그렇게 할까? 바로 "죽어서는 주기철, 살아서는 이원영"이다. 퇴계의 후손인 이원영 목사는 사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종으로 거듭 태어나 불의를 마다하고, 예안 3.1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했으며, 그리고 민족교육과 후진양성에 헌신한 초대 교회의 순수함 그 자체로 존경받아 마땅한 목회자다.
◆ 신사참배 거부한 산 순교자
한국 기독교는 대한민국이 건국 근거로 삼는 3·1운동을 주도했지만 민족 앞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는 원죄를 짊어지고 있다. 바로 3·1운동 이후 신사참배로 상징되는 친일, 반민족 행위를 한 것이 교회의 원죄다. 그러나 개신교계에서 신사참배를 극력 반대한 지도자가 있다. 바로 평북의 이기선(李基宣) 목사, 평남의 주기철(朱基撤) 목사, 경남의 한상동(韓尙東) 목사, 경북의 이원영(李源永) 목사, 전남의 손양원(孫良源) 목사, 만주의 한부선 선교사 등이다. 경남 진해와 서울에 기념관이 있는 주기철 목사가 죽음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면, 안동 출신 이원영 목사는 4차례의 투옥과 고문이 거듭되어도 끝내 굴복하지 않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산 순교자'다. 안동출신으로 안동땅에서 헌신한 교계 지도자이지만, 그의 정신과 행적 그리고 순수한 봉헌을 생각한다면 지역을 초월하여 기념관을 지어 그를 본받아나가야함이 마땅하다. 어두운 시절, 민족에게 희망의 횃불을 올려준 이원영 목사의 신행일치를 본받아 21세기 한국은 부정과 부패, 혈연과 지연 그리고 학연을 끊고 깨끗함과 순수함 그리고 사회공익을 생각하는 사회로 새롭게 나아가야만 살 수 있다.
◆ 선택당하느냐 선택하느냐
이원영은 유림의 고장 안동군 도산면 원천동에서 1886년 7월 3일 퇴계 14대손으로 태어나, 1958년 6월 21일에 소천했으나 그 향기로운 삶은 제자들에 의해 날이 갈수록 빛을 더하고 있다. 매년 이원영기념사업회에서 기일에 맞춰 기념식을 열고, 생전에 이목사가 남긴 유훈을 실천하려고 뜻을 모으고 있다. 전국적으로 이원영 목사의 제자들과 그에게 감화를 받은 인물들이 모여들고 있다. 이원영은 전통과 뿌리깊은 문중이 많은 추로지향의 도시 안동에서 한문서당을 다니며 전통 유교 교육을 받고, 일찌기 사서삼경을 뗐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신식사립학교인 봉성측량강습소와 민족학교인 보문의숙을 다니며 서양문물에 눈을 뜨면서 신지식인 혁신유생으로 거듭났다. 고향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었지만, 고향을 생각하고 민족을 생각하는 맘이 남달랐던 이원영은 1919년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서는 바람에 악명높은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옥살이를 했다. 이원영은 한창 피가 끓은 청년기에 나라를 일본 식민지로 잃고(25세), 민족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선에서 모든 것을 바쳐서 조국 독립을 위하여 투신했다.
이후 이원영은 조국 해방(60세)에 이어 분단의 아픔을 겪는 한국전쟁(65세)으로 이어지는 격변의 세월을 살았지만 퇴계 후손으로서의 기득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해묵은 권위의식을 버렸다. 하나님을 영접하고 나서는 만민평등의식을 갖고,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며 제자나 후학에게는 물론 하인이나 자녀에게도 존댓말을 하면서 전국민의 상향평준화를 시도했던 실천적 목회자로 살았다. 예수님이 가장 낮고 비천한 모습으로 인류를 구원해낸 것과 같이 살았던 그였기에 신앙후배들은 그의 체취가 묻어있는 사적지를 즐겨 찾는다. 단순히 이원영이 살다간 유적지를 찾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통해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민족을 위해 봉헌한 삶의 고결함에 고개숙이게 된다.
◆ 독립운동가로서의 첫 삶
역사는 개인을 선택하기도 하지만, 개인 또한 역사를 선택한다. 순간순간의 결정이 다 선택이다. 이 목사는 크게 세 가지 빛나는 선택을 했다. 첫째는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이다. 퇴계 14대 손으로, 원촌에서 전통 유학을 공부한 뒤 봉성측량강습소와 민족학교인 보문의숙을 졸업하면서 투철한 민족교육을 받았던 이원영은 안동시내에서보다 더 빠르게 예안에서 1919년 3월17일 3·1운동이 일어나자 기득권을 포기하고, 지역만세운동을 선도하는 혁신유림이 됐다. 예안 3·1운동으로 일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이 목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구국운동가인 이상동 장로를 만나 복음을 접하고 기독교인으로 회심했다. 두 번째 선택이었다. 고향에 돌아와 세례를 받은 이원영은 믿음의 친구들과 함께 섬촌에 교회당을 설립했다. 유림들의 정신적 고향인 도산서원이 내려다보이는 섬촌마을에 교회당을 짓자 문중은 벌컥 뒤집혔다. "당장 문중에서 나가거라!" 전통 유림의 정신적인 지주인 퇴계의 후손으로서 예수교인이 된 것도 마땅찮은데, 도산서원이 내려다보이는 섬촌에 교회당을 짓는다고 하자 갈등은 고조되어갔다.
◆ 목회자로서의 두 번째 삶
진성 이씨 문중은 도산서원 앞 시사단(과거 시험을 보던 곳)에서 문중회의를 열어 "야소교(예수교)는 서양 사학이고, 야소교회당은 도산서원과 함께 있을 수 없다."며, 도산서원 소유의 섬촌에 교회를 짓는 일을 반대했다. 문중의 교회당 설립반대와 섬촌교회에 대한 일부 청년들의 기물파괴, 재판정의 원상회복명령 등 반대와 갈등 속에서도 섬촌교회는 안동 개신교의 꽃으로 피어나 문을 열었다. 봉성측량강습소와 보문의숙을 졸업한 이원영은 또다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면서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목회자가 되면서, 이원영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며 지역 젊은이들에게 그리스도의 꿈과 희망을 심어나갔다. 1946년에는 경안고등성경학원(현 성서신학원)을 설립,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목사가 땅 사고 집 사면 삯군 목자로 전락한다."며 가진 모든 것을 시무하던 교회의 설립에 바쳤다. 1954년 예장 39회 총회장은 한경직 목사의 추천을 받아서 추대됐고, 당시 한경직 목사는 이원영 목사를 도와서 부총회장으로 협력했다.
◆ 신사참배를 거부한 세 번째 삶
세 번째 역사적인 선택은 한국교회사의 어두운 상처라고 말하는 신사참배에 대한 태도이다. 이 목사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4차에 걸쳐 투옥과 고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외에 어떤 우상도 섬길 수 없다는 순수한 초심을 지켜냈다. 신사참배 동방요배를 하지 않을 수 없자 딸인 이정순(현 대구 대봉교회 권사) 등 자녀들을 등교시키지 않았다. 해방을 앞두고 일제의 발악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행해졌던 4차 검속에서 해방이 되는 바람에 경산경찰서에서 산 송장으로 풀려나 안동성소병원으로 직행한 지 11일 만에 극적으로 의식을 되찾아 '산 순교자'라는 평을 듣는다. 신사참배문제로 교단이 분열되어 나갈 때 출옥성도인 이 목사는 "신사참배한 것도 잘못이지만, 신사참배 반대하다가 투옥되어 고생한 것도 당연히 할 것을 한 것뿐이지 하등 자랑할 것이 아니다."며 자신의 공을 내세워서 교단을 분열시키는 일을 지양했다. 오직 성서의 말씀대로 우상을 숭배하지 않음으로써 오는 온갖 고난을 스스로 감수했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소리없이 목회자로서 또한 교육자로서 가야할 길을 당당하게 걸어갔다.
◆ 예수님처럼 낮은 길로 가다
정신이 맑고 고결한 이원영 목사의 사적지를 찾다보면, 우리가 누구를 본받으며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대번에 알게 된다. 인간은 오만가지 죄로 가득 차 있지만 겉보기에는 모두 점잖은 신사요, 아름다운 숙녀다. 그러나 계명의 막대기로 한번 휘저어 보라. 갖가지 죄가 와글와글 일어난다. 이원영 목사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만이 인간의 원죄를 씻어주고,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 평생 신행일치하는 완벽한 삶을 살았다. 퇴계의 집에서 태어나,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간 이원영은 도산의 우뚝 선 거대한 푸른 소나무처럼 만고상청하는 예수님의 자녀이다. 이원영 목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경안신학대학원대학교, 구 안동서부교회(금곡동, 안동서부교회는 2006년 12월10일 안동시내 새성전을 헌당했다), 관주 신약성서, 6.25때 강론을 하다가 인민군의 총알을 맞은 강대상, 경안노회 선교기념관 등 사적지와 유물을 제대로 보존하고, 기념사업이 활성화되기를 바란다.
◆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평등하다
이원영 목사는 신사참배 문제로 왜경의 탄압을 받아 교회에서 쫓겨나 처가에서 마련해준 복숭아밭을 가꾸며 교회와 교인들과 단절된채 사는 수모도 마다하지 않았다. 결코 그런 사실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오복사골에서 이 목사는 자녀들을 가르쳤으며, 이 시절 사모 김기출 여사의 노고가 컸다. 이 목사는 만인은 하나님의 자녀로 평등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일을 도와주는 아랫사람이나 제자들, 어린 아이들이나 자녀들에게도 결코 말을 낮춘 적이 없이 항상 높임말(예대)을 쓰며, 신앙의 힘으로 만인은 평등하다는 사상을 실천한 참 목회자였다. 지금도 안동지역에서 신앙인으로서, 정신적인 지주로서 존경받고 있다. 이원영 목사가 시무한 82년 전통의 안동서부교회는 지닌 12월10일 안동시내 태화동에 새 성전을 마련, 헌당식을 가졌다.
글·최미화기자 magohalmi@msnet.co.kr
사진·정우용기자 v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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