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 나의 삶, 김수학] 보릿고개 흔적

입력 2006-12-11 07:08:20

내 고향 경주시 중심가에서 30여 리, 동해 甘浦(감포)읍으로 넘어가는 東大本山(동대본산) 산마루 고개 밑엔 暗谷(암곡)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지역은 참숯 원자재인 '참나무'가 群生(군생)하고 있어 과거 山林警察(산림경찰)을 피하여 참숯을 구워 팔며 연명하던 사람도 많았다. 또한 이 마을 주변 산 속에는 칡뿌리, 도토리, 산딸기, 산나물 등 갖가지 구황식물이 자라고 있어 춘궁기가 되면 遠近(원근) 각 지역으로부터 많은 채취꾼이 모였다.

해방 전에는 잡목 가지를 꺾어서 묵은 땔나무로 쓰기 위한 경주 주민의 연료 공동채취장으로 지정되어 추위를 면하기 위해서는 매년 초겨울 공동채취를 할 때, 희망자 중 일정인원을 출역시켜야만 소정의 양을 배당 받는다. 물론 우리 집에서도 선친께서 出役(출역)을 해야만 했다.

겨울철, 마을 남정네들은 암곡을 향해 함께 떠났다. 짚으로 '움막집'을 만들어 잠을 자며 어렵사리 모은 연료는 '등이 따스하면 배부르다'는 말이 있듯이 가족들의 겨울을 따뜻이 지펴주었다. 장정들이 돌아오는 날은 마을의 축제일이었다. 떡과 밥을 해서 기다리면 멀리서 우차가 열을 지어 왔고 등 따습고 배부른 것으로 월동준비는 안심이었다.

2001년 여름, 암곡마을을 찾았다. 幼年期(유년기)에 시내에서 살았기 때문에 선친의 기억뿐 아니라 나와 동년배인 주민들이 궁금했다. 그들에게서 보릿고개를 넘어온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노인정에 모인 40여 명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대부분 70, 80대로서 보릿고개를 넘어온 산증인들이다. 川魚湯(천어탕)에 막걸리를 곁들인 그 날의 잔치는 처음엔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마도 과거의 기억들을 부끄러이 여겼던 모양이다.

"힘들게 예까지 넘어왔습니다. 이젠 그래도 쌀밥을 먹으니…."

내가 먼저 말을 꺼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忍苦(인고)의 서러운 독백들이 이어졌다.

"친정 고향은 경주시 외동읍 죽동이라예. 열아홉에 암곡으로 시집와 보이, 부칠 땅이란 한 치의 논·밭도 없고 쪼만한 오두막 하나뿐이라예. 그때는 처녀 나이가 열아홉 살이문 늙은 축이라. 그래 친정서 여길루라두 보내야 한다캐서 안 왔능교? 요시 사람 같으문 그냥 안 살구 가버립니더. 그라도 내가 중심이 있어가 홀 시어른 뫼시구 시동생을 둘씩이나 데리구 살았어예."(박갑순 씨·83)

"내사 불국사 근처서 살다가 개죽 쑬 것두 없는 집으루 열아홉 먹어가 시집왔는데 신랑이 천식 환자라. 다 내 팔자가 사나운 거여….

남들은 남정네들이 숯 구워가 좁쌀이라두 사먹는디 나는 그런 호강두 못해봤소. 우리 영감이 그래 병이 들어가 숯도 못 굽고 칡뿌리도 못캐요. 그르니 내사 어른네 데리구설랑 숯을 구우러 다니문서 얼매나 울었든지…."(김우매 씨·88)

"그때는 집밖에 나가 보문 부황증이 들어가 퉁퉁 부은 사람들 천지였습니더. 사람이 나물허구 된장만 먹으니 부황증이 안 들겄습니꺼. 지끔이야 나라에서 구호대상자를 뽑아가 밀가루도 주고 허니 그런 사람이 적지만서두 그때는 보릿고개만 되문 모다 난립니더 난리….

해방 전엔 또 공출이란 것이 있어가 아주 사람을 죽였습니더. 쌀 한톨 없는 집들이 뭘 내놓을 게 있겄습니꺼. 그라도 무조건 내 놓으라카니 소작 부치던 사람들이사 뙤약볕에 일헌 품을 죄다 뺏기지 않았겄습니꺼?" (김규택 씨·72)

가슴이 뭉클하고 목이 메는 얘기였다. 나는 북받치는 설움 같은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전 경북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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