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 마침 미국 전역을 돌며 한국의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대표적인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을 때였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미국인 교수 한 분을 초청해 함께 관람을 했다. 전시관을 다 둘러본 후 그분은 회화나 도자기 등 각종 예술품에 유난히 '대나무' 그림이 많다는 소감과 함께 어떤 연유가 있는지를 물었다.
조선시대에 학자와 정치인들은 비록 부러질지언정 굽혀지지 않는 대나무와도 같이 자신의 지조를 지키는 '선비정신'을 숭상했기에 그런 것 같다고 임기응변으로 설명했다. 이와 같은 설명을 들은 그 미국인 교수의 말은 "그렇다면 한국에서 민주주의 정치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수년 전에 중국의 학자들이 서울 명륜동에 있는 성균관을 참관하고 제례방식 등에 대해 설명을 듣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문화혁명 시절에 중국인들이 전통적인 것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특히 유교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나, 개혁개방 이후 새로 전통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다.
흥미로웠던 것은 한국의 성균관이 세계 어디에 있는 것보다도 가장 '원형'에 가까운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는 대목이었다. 요즈음 우리나라 정치·경제·사회 등 각 영역에서 집단들 간에 협의와 절충보다는 투쟁과 대치가 비일비재하는 상황을 보면서 떠오르는 일화들이다.
정치와 행정에서 이념은 필수적인 것이다. 정책에 대한 시각의 차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공공의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기 위한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공동체 구성원 간의 시각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며, 사고의 다양화라는 측면에서 바람직한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이념'을 부정적으로 보는 인식이 있다. 그 이유 가운데에는 자신과 다른 시각의 이념을 애써 존중하지 않거나, 그 자신도 특정의 이념에 입각해 사고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다양한 유형의 이념이 발전해 왔고 또 앞으로도 발전할 것이다. 20세기 이후만 해도 다양한 스펙트럼의 이념이 대두해 우리의 사고방식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왔다.
먼저, 공산주의나 파시즘처럼 생산양식 혹은 정치경제에 대한 체제수준의 좌우파적 시각의 차이를 나타내는 이념들이 있다. 이처럼 경기(game)의 판 자체에 대한 시각의 차이 그리고 그에 근거하여 변화를 추구하는 이념 간에는 대화를 통한 절충은 애초부터 불가능해 한 공동체에서 공존하기란 극히 힘들다. 동서독과 남북한처럼 결국 갈라져서 '딴살림'을 차릴 수밖에 없게 된다. 2차대전 이후 서독에서 양극단의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정치활동을 억제하고 국민교육까지 시킨 것은 이 때문이다.
한 공동체의 울타리 내에 공존하면서 정책 대결을 하는 경우에도 시각 차이의 폭에 따라 제도수준의 이념과 행위수준의 이념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제도 수준의 이념은 경기의 규칙 자체에 대한 시각 차이와 그것을 반영한 변화의 추구와 관련된다.
서구 유럽에서 정당 간에 복지국가, 공기업, 지방분권 등의 수준에 대한 시각 차이가 전형적 예가 될 것이다. 반면에 행위수준의 이념은 기존의 경기 규칙의 틀 속에서 상호 경쟁이 이루어지는 경우이다. 같은 정책이라도 어떻게 하면 시민들에게 보다 효과적이고 친절하면서도 저렴한 비용으로 공공서비스를 전달할 것인가 주력하는 미국 정당들의 시각 차이가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복이 심한 역사 발전을 경험해 온 유럽 국가들의 경우 좀더 다양한 스펙트럼의 이념이 활성화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역시 기복이 심한 역사 발전을 경험한 우리나라의 경우는 미국보다는 유럽에 좀더 가까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에 이르러 미국과 유럽 모두에서 정당들이 좀더 중도의 시각으로 수렴하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앞으로 정당 간에 이념 폭이 점차 좁혀지는 현상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병행하여 다른 생각을 지닌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협의를 통해 이를 절충해 나가는, 그래서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있는 정치문화로 발전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형식적 민주주의에 더하여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구현도 가능해질 것이다.
정용덕(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한덕수·이준석 이어 전광훈까지…쪼개지는 보수 "일대일 구도 만들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