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도하)축구장에 나타난 북한 노동자들

입력 2006-12-05 08:09:54

4일 여자 축구 베트남과의 경기가 펼쳐진 '알 라얀 축구 경기장' 관중석은 드문드문 나무가 자랄 뿐인 도하의 황무지마냥 황량했다.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들을 세는데 1분도 안 걸릴 정도였다. 한쪽에선 현지에서 일하는 베트남 노동자들 30여명, 철망 건너 한국쪽 관중석에는 교민과 관광객 각 한 가족, 그라운드를 달리는 언니들을 응원하러 온 여자당구 국가대표 김가영(23)·차유람(19) 선수가 전부. 조촐한 응원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한국의 일방적인 흐름으로 진행됐다.

한데 후반전도 중반으로 치닫을 무렵 등 뒤에서 조금씩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햇볕에 그을려 까무잡잡한 얼굴에 수더분한 차림새의 일행. 일본인이나 중국인 같지 않은 느낌을 주는 이들이 조금씩 관중석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귀를 기울여보니 우리말이 들려왔다. 하지만 억양은 낯설었다.

북한 사람들이었다. 다음 경기가 북한 경기이다 보니 응원을 하러온 모양. 태극기를 들고 한국을 응원하던 관광객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자 "안녕하십네까. 남조선에서 오신 모양이구만요."라고 받는다. 그러면서 "안내원에게 코리아 경기 보러왔다고 하자 이리로 보내버렸구만."이라며 자기들끼리 웃으며 수군댔다.

그러고 보니 베트남인들이 응원하던 철망 건너 자리에 어느새 300여명 가까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닌가. 그네들이 손짓하며 길을 잘못 든 일행에게 "이리 건너오라우. 그쪽이 아니야."라며 불렀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한 사람이 한마디를 툭 던졌다. "남과 북이 축구경기장에서도 철망 사이로 갈라져야 하는군."

아무리 봐도 북한 선수단 관계자들 같지는 않았다. 함께 앉아있던 현지 교민에 따르면 이곳에 와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들로 보인다는 것.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그 같은 이들이 꽤 된다고 했다. 마치 우리가 70년대 외화를 벌기 위해 '열사의 땅' 중동에 많은 노동자들을 보냈던 것처럼.

사진도 찍고 이야기도 나눠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 기자가 북한 쪽 응원석으로 다가서려 하니 그 교민이 손사래를 치며 말린다. 대답을 해주지 않을뿐더러 큰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고 한다. 더구나 맞은편 본부석 쪽에 '높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을 테니 그들을 곤란하게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고 귀띔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관중석 뒤편 계단에 홀로 있던 이에게 말을 붙여봤지만 역시 별무소용.

아쉬운 마음을 접고 돌아서는 등 뒤로 북한 사람들의 떠들썩한 응원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두터운 옷을 입은 채 인공기를 흔들며 해가 지면서 차가워진 공기만큼이나 썰렁해진 경기장을 덥히고 있었다.

도하에서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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