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 시험의 제시문으로 '깊이가 깊은 호수에 수영할 줄 모르는 두 사람(A와 B)이 빠져서 구조를 요청하고 있는 바로 그 때 당신이 그 장소를 한가롭게 지나가고 있다고 가정하라. A와 당신과의 거리는 너무 멀어서 당신의 수영 실력으로는 구조할 확률이 아주 낮아 보이지만 B와의 거리는 지척이라 확실히 구할 수 있다고 또한 가정하자. 여건상 단 한 명밖에 구조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아마 당신은 (당연히) B를 구할 것이다. 그러나 사정을 조금 바꾸어서 B는 모르는 사람이지만 A는 당신의 어머니라고 가정하자.'가 출제되고 '이 상황에서 당신이 취할 행동을 결정하고 윤리적으로 정당화하라.'라는 한 논제가 주어졌다고 가정해보자.
이 논제에 적절한 해결책을 제공하기 위해 어떤 특별한 고액 논술 과외나 교과서 주제를 넘어선 특별한 선지식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윤리 과목에서 배우게 되는 공리주의나 의무론 등에 관계되는 꽤 쓸 만한 윤리학적 배경지식에만 기초한 적당한 배열도 채점자의 마음을 이성적으로 자극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학생들은 어떻게 이 제시문과 논제를 논리적,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창의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가? 어떻게 독창적인 자기 가치관과 세계관을 포함한 주장을 논리-비판-창의라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합리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가?
아마 대부분의 학생들은 어머니를 먼저 구한다는 획일적인 대답을 미리 전제하고 그런 행동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하려는 모순적인 시도로 시간을 다 허비해버리거나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궤변적 논리로 답지를 메우게 될 것이다. 필자가 한국의 여러 대학들에서 같은 문제를 제시하고 토의해본 결과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평생 동안 누구와도 이런 종류의 가치문제에 관한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신중한 논의를, 어떤 권위에도 지배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학생들뿐만 아니라 논술 선생님들과 대부분의 부모님들조차도 상황은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우리가 언제 그런 논쟁을 신중하게 해본 적이 있는가? 그저 어릴 때부터 가정과 학교 그리고 사회에서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고루한 생각을 과연 한 번이라도 스스로 심각하게 비판해 본적이 있으며 학생들이나 자식들과 근본적으로 토의 또는 논쟁 해본 적은 있는가?
이런 느낌은 필자가 미국 주립대학의 철학개론과 윤리학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항상 동일한 질문을 제시하고 토의할 때 느꼈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미국의 대학생들은 획일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으며 비슷한 선택을 한다 하더라도 그 이유가 다양하고 합리적이었다. 식을 암기하여 주어진 조건에 대입해서 문제를 푸는 학업성취도의 측면에서 그들이 우리의 대학생들보다 더 우세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사실 거의 없다. 그러나 중요하고도 중요한 특정 가치문제에 대한 자기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서술하고 자기의 결론에 대한 적절한 증거나 이유를 제시하고 정당화하는 것만은 미국 대학생들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그 이유는 아마 부모님들이나 선생님들께서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위의 '사람 구하기' 상황에서 당신이 부모에 대한 염려로 A를 먼저 구하든 공공의 안녕에 대한 영웅적인 염려로 B를 먼저 구하든 그것은 그리 중요치 않다. 단지 논술 글쓰기에서 필히 포함되어야 할 것은 누구를 먼저 구하든 간에 주어진 논점에 대해 '왜' 자신이 그 행동을 하기로 결정했는가에 대한 적절한 이유와, 그 이유를 가능한 비판으로부터 '어떻게' 합리적으로 변호해 나가는가 하는 논증적 과정이다. 논술이 어렵다는 것은 바로 이런 부분을 단 시간 안에 만족스럽게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명저에 관한 오랜 독서와 그 주제들에 대한 심각한 비판적 토론을 통한 사고훈련이 바로 요구된다.
이런 자기주장에 앞서 반드시 선행되어야할 부분은 먼저 주어진 논제에 관한 논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에 대한 앞선 견해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논점을 이해했다면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그 논점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들을 반드시 비판하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필자는 모든 것에 대해서 왜 그런가라고 병적으로라도 비판해보는 기본적 태도를 평소에 가지라고 자주 학생들에게 이야기한다. 비판하지 않고 새롭고 창의적인 사고는 나오지 않는다. 뉴턴은 사과나무 아래서 누구라도 지나쳐 버리는 단순한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을 '왜 사과는 떨어지는가 또는 떨어져야 하는가' 라는, 그리고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 욕조에 몸을 담그면서 물이 넘치는 단순한 현상을 보고 '왜 그럴까' 하는 비판적 사고를 가졌기 때문에 만유인력과 부력의 법칙을 각각 발견하여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창의적인 사고로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위의 '사람 구하기' 상황에서 왜 어머니를 먼저 구해야 하는가라는 비판적 사고를 가져 보아야 할 것이다. 누군가 아주 익숙한 주장인 "어머니를 먼저구하는 것은 천륜이며 하늘의 법칙이라서 이유가 필요치 않다"라고 핏대를 올리더라도 개의치 말고 오히려 그런 주장을 먼저 비판해보라. 그리고 자기의 입장을 '왜'와 '어떻게'라는 범주에서 설득력 있게 진행해야한다.
이런 절차가 어느 정도 진행된다면 그 내용을 글쓰기 규칙이라는 기본적 형식을 통해서 서술해 나가야 한다. 이런 규칙에 관한 것들은 이후에 자연스럽게 다루어질 것이다. 이제 학생들은 위에서 주어진 '사람 구하기' 제시문과 논제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을 묻고 있는가 하는 논점을 파악하고 그것에 대한 일반적 견해들을 비판하는 단계까지 사고를 진행해보고 부모님들과 논의해보자.
이종왕(영남대 철학과 교수)
※ 필자의 장기 출장으로 지난달 17일 이후 연재를 중단했던 철학 이야기를 이번 주부터 다시 싣습니다. 논술에 대해 고민하는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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