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 나의 삶, 김수학] '두대마을' 사람들의 한(恨)

입력 2006-11-23 07:29:01

IMF 직후 오랜만에 고향인 경주시 율동 두대리를 찾았다. '斗垈(두대)'란 신라의 장씨 성을 가진 만석꾼이 벽도산에 올라보니, 쌀뒤주처럼 생긴 마을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마을 서쪽 安國寺(안국사)의 '두대리 마애석불입상(보물 제122호)'을 비롯해 인근에 유적들이 산재해 있고, 전해 내려오는 설화 등도 적지 않아 고풍스러운 정취도 느껴지는 곳이다.

이곳 산천과 주민 속에 깃든 온갖 내력과 사연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여행을 하게 만든다. 두대마을 주민들 중 일부는 과거, 이곳에서 1km 가량 떨어진 '당매기'마을에 살던 사람들이다. 몇 년 전, 마을 중앙을 관통하는 국도가 확장되고, 바로 옆에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됨에 따라 소음과 '고속도로 주변 경관 정비'라는 명목으로 당매기 마을은 폐촌이 됐다. 주민 일부는 두대마을로 이주하고 나머지는 흩어졌는데 필자의 전답도 그 주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흔히 행정에 대한 비난의 대명사로 쓰이는 '행정편의주의'의 소산이기도 하나, 더 큰 문제는 사후대책이 미흡하다는 점이다. 행정은 주민이 안전하게 생활하는 場(장)을 등한시했다. 결과적으로, 산지에 개간된 전답은 거의 廢耕(폐경)되어 순박한 村心(촌심)은 짓밟혀졌고,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삶의 터전은 하루아침에 황무지가 되었다.

필자가 두대마을을 방문, 친지들을 찾으면 간혹 있어야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동민들에게 사연을 물으면 교통사고로 타계했다는 것이다. 한창 일할 나이인 두 사람이 교통사고로 불구가 되고 안사람까지 크게 상처를 입었던 사고가 있었다. 한 사람은 농사일을 마치고 경운기를 몰고 귀가하다가 승용차에 들이받혀 그 자리에서 죽었고 또 한 사람은 불구가 됐다고 한다.

도회 사람들에겐 이같은 사고가 九牛一毛(구우일모)나 한 알의 좁쌀(滄海一粟 : 창해일속) 쯤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농촌마을들 중 특히 국도에 인접한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괴로움, 피해자 가족 친지들이 겪는 물질적, 정신적 고통은 비용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문병 차 그의 집을 찾았다. 가장이 1년 넘게 병원신세를 진데다 평생을 누워 있는 형편에 위로금이라고 고작 900만원을 받았다는 말에 또다시 가슴이 저며온다.

이 도로의 아스팔트 밑바닥에는 비포장시절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머리에 이고 지게로 저나른 자갈 모래가 묻혀있다.

"박서방! 김서방! 이서방은 아들이 대신 왔고…"

夫役(부역) 출석을 점검하던 이장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한 60여 년 전, 그 고된 노동을 했던 사람들은 모두 인근 주민이었다. 임금은 물론 한푼도 없었다.

일제강점기 부역에 시달린 주민들은 큰 돌을 관리들의 머리에 빗대어 한 맺힌 勞動謠(노동요)로 지친 몸과 서러운 마음을 달랬다.

"요 놈은 도지사 대가리요, 요건 군수 대가리, 요건 또 면장 대가리에 이장 대가리라~"

이 도로 밑바닥에 깔린 조상들의 땀과 눈물로 엮어진 피맺힌 사연을, 요즘 젊은이들은 알고 있을까? 그들이 느끼는 질주의 쾌감 속에 묻혀진 先代(선대)의 뼛속 깊은 恨(한)을 알고 있을까?

淺學(천학) 탓인지 1988년 10월, 내무부가 발행한 '한국지방행정사'를 비롯해 전국 어느 지방의 '道史(도사)'나 문건에서도 도로에 부역을 부과한 기록은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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